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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관한이야기

김종직 '유두류록'] 도포 입고 짚신 신고… 왜 그리 높은 산 올랐을까?

남산동 2020. 6. 14. 13:30

함양에서 올라 천왕봉 두 번이나 밟아… 이상향 ‘청학동’ 찾아 헤맨 듯
글 월간산 박정원 부장대우

  • 사진 정정현 국장
  • 지리 동북부의 현장

비가 오고 짙은 안개로 시야가 흐리더니 두류봉 정상에서 갑자기 바람이 구름을 몰고 가자 일순 구름과 어울린 봉우리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장관을 연출했다.

‘아, 두류산은 숭고하고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嵩山(중악)이나 대산岱山(동악 태산)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봉선을 하고, 옥첩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이산이나 형악(남악)에 비유해야 할 것이다.

창려韓昌黎·주회암朱晦菴·채서산蔡西山 같이 학식이 넓고 단아한 사람이나 손흥공孫興公·여동빈呂洞賓·백옥섬白玉蟾 같이 연단술을 수련하던 사람들이 옷깃을 나란히 하고 뒤따르며, 그 속에서 배회하며 살았을 것이다.’ — 강정화 교수 <지리산 유산록> ‘김종직 유두류록’ 발췌

조선 4대 사화 가운데 최초로 발생한 무오사화로 부관참시 수모를 당한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인 1472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5일 일정으로 지리산을 유람했다. 나이 42세 때 그가 유람했던 코스는 첫날 함양군 관아→엄천→화암→지장사→환희대→선열암→신열암→고열암(1박), 둘째 날은 고열암→쑥밭재→청이당淸伊堂→영랑재永郞岾(두류봉)→해유령→중봉→마암馬巖→천왕봉→성모사(1박), 셋째 날은 성모사→통천문→향적사(1박), 넷째 날은 향적사→통천문→천왕봉→중산中山(제석봉)→저여분沮洳原(세석 추정)→창불대→영신사(1박), 마지막 날은 영신사→영신봉→한신계곡→백무동→실택리→등구재를 거쳐 함양군 관아로 돌아왔다.

그가 유람한 코스의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보다 흔적 없이 사라진 곳이 더 많아서 정확한 코스를 알 수 없다. 최대한 그의 자취를 밟기 위해 촌로들로부터 함양의 옛 지명을 들어본 적이 있을 법한 토박이 중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이하 공단) 직원으로 있는 선득영씨와 윤봉호씨를 소개받았다. 또한 김종직이 첫날 방문한 화암부터 둘째 날 중봉까지는 현재 (원시림)특별보호구역으로 등산객 출입통제구역이라 공단의 사전 허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토박이는 역시 달랐다. 인적이 드문 지리산 북쪽 자락도 손바닥 들여 보듯 파악하고 있어 무사히 답사를 마쳤다.

지리산 주능선과 어울린 운무가 아름다운 장면을 자아내고 있다.

두류봉 코스는 지리산 주능선 보여

이들을 오전 5시50분 금계마을 의탄교에서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적조암으로 향했다. 오후 7시까지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려면 최대한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김종직이 이틀 걸려 간 산길을 하루 만에 도착하기엔 너무 멀고 험하다는 것이다. 차량으로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가자고 했다. 응암마을 제일 윗집에 양해를 구하고 주차했다. 오전 6시40분쯤 출발.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은 길이라 나무와 풀이 무성하다. 등산로를 제대로 찾을 수 없다. 간혹 불법 등산객들의 리본이 눈에 띄기도 한다. 출발부터 숲속 가파른 길이 시작됐다. <유두류록>에는 ‘화암을 지나 지장사 터에 당도했다’고 나온다. 지장사 터는 올라가는 코스와는 조금 서쪽으로 떨어져 있다고 한다. “지장사는 지금 어렴풋이 난 등산로와는 또 다르다”며 “옆길로 빠져 지장사를 거쳐 다시 신열암·고열암·선열암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시간관계상 지장사 터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직행했다.
큼직한 반석이 하나 나온다. “환희대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출입금지구역이라 유적지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유산록에는 ‘환희대 주변 묘정암·지장암에 왕래했다’고 돼 있다. 온통 절이나 암자뿐이다.

우뚝 솟은 바위가 잇따라 등장한다. 김종직이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 바위다. “지금은 함양독바위라 부른다”고 선·윤씨가 설명한다. 주변엔 여러 암벽들이 우뚝 솟은 형국이다. 짙은 안개 때문에 시야가 매우 흐리다. 주변 지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왜 독녀암이라 불렀는지에 대해선 유산록에 ‘전하는 말에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바위를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자세히 나온다.

바위 틈새에 여자 혼자 살 만한 공간이 있는지 가까이서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찾을 수 없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자 바위 틈새로 난 길을 지난다. 입구에 ‘安樂門안락문’이라 글씨를 새겨놓았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석각인 듯하다. 유산록에 없는 내용이다. 지날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영락없는 여성음부를 닮았다. 독녀암과 안락문이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이다. 여자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하는데, 여성과 안락문을 연결시키는 건 혼자만의 상상일까.

1km 남짓마다 절이나 암자로 동선 연결

신열암·고열암·선열암 중에 고열암 터를 윤씨가 안내했다. 그것도 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다. 절터라고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이다. 김종직은 고열암에서 1박을 했다고 했으나 당시 절 규모를 전혀 가늠할 수 없다. 당시 지리산 자락에만 절이 400여 개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1km 남짓 지나면 절이 하나씩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시대의 유산이나 유람의 동선은 거의 절과 절을 연결시켜 움직였다. 이는 조난이나 호랑이·늑대로부터의 위협에 대피하는 기능도 동시에 했을 법하다.

김종직은 고열암에 도착해서 ‘나는 처음으로 험난한 길을 거의 20리(8km)나 걸었다. 매우 피곤해 일찍 곯아떨어졌다가 한밤중에 깨었다. 달빛이 여러 봉우리를 삼킬 듯 뱉을 듯하고, 운무가 용솟음치며 솟아오르고 있었다’고 유산록에 기록하고 있다.
지리산 북쪽 능선은 정말 가파르다. 출발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났지만 오르막의 연속이다. 땀이 비 오듯 솟아진다. 청이당淸伊堂 터에 도착할 즈음에 마침내 비가 쏟아진다. 출발 이래 계속 후텁지근한 날씨에 짙은 안개로 애를 먹었다. 차라리 비가 내리니 일순 안개는 걷힐 것 같다.

청이당 터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 밑자리를 찾아 점심을 해결했다. 청이당은 없고 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벌써 6시간 이상 걸어 낮 12시가 한참 지났다. 청이당 터 옆 계곡에 흐르는 물을 그대로 마셨다.

그런데 청이당은 또 뭘까? 김종직은 ‘판자로 지은 집이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고 했다. 의미만으로 보자면 맑은 집이다. 무속인의 집이지 않을까 싶다. 유정자씨도 “마을 서낭당일 것 같다”고 추정했다. 이 깊은 골짜기에 서낭당 한 채만 달랑 있었는지 아니면 마을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1 지리산 특별보호구역에 수백 년 된 돌배나무로 추정되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 2 지리산 통천문으로 내려오고 있다. / 3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화랑·최치원·이인로 등 고대 인물 전부 등장

계속해서 ‘이곳에서 영랑재(두류봉으로 추정)까지는 길이 매우 가팔라 <봉선의기>에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만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본다고 한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고서 겨우 오를 수 있었다’고 김종직은 밝혔다. 정말 나무뿌리를 잡고 올라간다. 가도 가도 오르막이다. 서서히 체력이 떨어졌다. 비도 내린다. 짙은 안개로 시야는 확보가 안 된다. 최악의 상황이다.

안간힘을 다해서 두류봉으로 올라섰다. 완전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잠시 비가 멈추고 바람이 안개를 몰고 가더니 운무에 덮인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선경이 따로 없다. 지리산 주능선이 긴 자태를 드러났다. 여태 숱하게 종주를 했지만 지리산 주능선을 옆에서 바라보기는 처음이다. 흔치 않은 풍광과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만으로 천만다행이다. 비 오는 날의 산행은 이런 쾌감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할 것 같다.

‘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영랑재)가 가장 우뚝했는데, 이곳에 올라보니 다시 천왕봉이 우러러 보였다. 영랑은 신라시대 화랑의 우두머리였다.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 산수 사이를 찾아다녔는데,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에 이름이 생긴 것이다.’

김종직이 설마 이 높고 험한 곳에 화랑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상상과 더불어 진한 감동의 여운을 지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특별보호구역답게 원시림의 비경을 만끽한다. 관리되지 않은 산길이라 더욱 힘이 든다. 영랑재, 아니 두류봉부터 지리산 주능선을 저만치 앞에 보면서 걷는다. 물론 안개가 살짝 걷히는 순간만 볼 뿐이지만 한껏 기대에 부풀게 한다.

해유령蟹踰嶺이 등장한다. 게가 넘어가는 고개라는 말이다. 아니, 이 깊은 산골에 웬 게란 말인가. 선·윤씨는 “골짜기 아래 마을에 민물 게가 많이 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설명은 이해가 되지만 그 게가 이 높은 고개까지 올라오려면 죽을 때까지 기어도 안 될 것 같다. 어쨌든 지명은 해유령이다.

힘들게 중봉中峰에 도착했다. 해발 1,875m로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유산록에는 ‘이 산 속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모두 돌로 되었는데, 이 봉우리만은 흙으로 덮여 중후했다’고 돼 있다. 중봉부터는 등산객이 출입 가능한 등산로다. 길이 한결 수월하다.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그나마 가볍게 느껴진다.

‘저녁 무렵 천왕봉에 올랐다. 운무가 자욱하고 산천이 모두 어둑어둑하여 중봉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에 들어가 작은 부처를 받들고 날씨가 개이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나는 갓을 쓰고 띠를 매고 손을 씻은 뒤 돌층계를 잡고 사당에 들어가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성모에게 고유했다.’

그 당시 한복차림으로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종직은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출발한 지 꼬박 12시간 걸려서 천왕봉에 도착했다. 아직 장터목대피소까지 한 시간여 더 가야 한다. 온몸에 힘은 하나도 없지만 간혹 바람이 구름을 걷어가는 그 순간의 비경에 감탄을 자아내는 감동의 힘으로 걷고 있다.

그런데 김종직이 왜 이리 힘들고 험하고 높은 곳에 산행을 했을까? 도포 입고 짚신 신고 산행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당시 분명한 사실은 13~14세기부터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을 중심으로 자연을 찾아 풍월을 읊는 유람과 유산이 유행처럼 퍼졌다. 도교와 무위자연사상의 영향을 이미 상당히 받은 듯하다. 특히 13세기 이인로 이후 청학동을 찾는 선비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김종직도 청학동을 찾아 올랐다. 그가 찾은 청학동은 피아골이었다. 피아골도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하게 연상된다.

안락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 틈새로 빠져 나오고 있다.

지리산 산신과 마야부인·위숙왕후도 언급

김종직의 성모에 대한 묘사는 자세하다.

‘성모는 석상인데, 눈과 눈썹 그리고 머리 부분에 모두 색칠을 해놓았다. 목에 갈라진 금이 있어 그 까닭을 물으니 “태조(이성계)께서 인월에서 왜구를 물리치던 해에 왜구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칼로 석상을 쪼개고 갔는데, 후세 사람들이 다시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사당 건물은 세 칸뿐이라 했는데, 김종직은 성모사에서 다시 1박을 했다. 우린 장터목까지 더 가야 한다. 살짝 밀어도 넘어질 것 같다. 저녁 7시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무려 13시간을 더 걸었다. 총 18.5km쯤 됐다. 등산화도 물에 빠져 철퍽거린다. 훨씬 무거워졌다.

김종직은 정상에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한다. 천왕봉을 두 번이나 밟고 통천문을 거쳐 영신사로 향한다. 동선은 전부 절과 암자다. 향적사에서 다음날 잠을 잤다고 밝히고 있다. 향적사는 장터목에서 천왕봉 쪽 고사목이 있는 지점 아래에 있었다고 전한다. 역시 절터만 남아 있다. 지금까지 있었으면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이 되겠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높은 절은 해발 1,650m 높이에 있는 지리산 법계사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엔 그보다 더 높은 절이 수두룩한 듯하다.

김종직이 지금은 없어진 향적사와 영신사에서 각각 하룻밤을 지내면서 천왕봉을 두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한 길을 무시하고 우리는 다음날 영신사로 직행했다. 그는 중산(지금 제석봉)과 저여분(지금 세석으로 추정)을 거쳐 영신사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저야원沮洳原에 대한 설명이 눈길을 끈다.

‘시루봉을 지나 습한 평원에 다다랐다.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쯤 펼쳐져 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샘물이 주위를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했다. 물가의 초막 두어 칸을 살펴보니, 울타리를 둘러쳤고 흙으로 만든 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바로 내상內廂(조선시대 병마절도사가 주둔한 병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에서 매를 잡는 초막이구나.’

옛날 세석 그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돼 농사를 짓고, 마을 사람들이 매를 잡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김종직은 청학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살짝 밝힌다.

‘창불대를 지나가는 길에 악양현의 북쪽을 가리키며 “저 곳이 청학사가 있는 동네입니다”라고 해공이 말했다. 나는 “아! 이곳이 옛 사람이 이른바 신선이 놀던 곳이라는 데인가? 이곳은 속세와 그리 멀지 않은데 미수 이공李公(이인로를 지칭)이 어째서 찾다가 못 찾았을까? 아마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 아닐까?”라고 상상했다.’

우리는 세석대피소 직원의 안내로 다음날 영신사 터로 향했다. 세석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출입통제구역에 터만 남아 있다. 한때 한국 최고의 명당이자 무속인들이 기도 터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지금 그 자취는 온데 간 데 없고 바위와 돌멩이 몇 개만 남아 전한다. 영신사 이름 자체도 예사롭지 않다. 영험스런 신을 부른다는 뜻이다. 그 자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려 본다. 샘물이 두 군데서나 솟아난다. 명당을 알아보는지 멧돼지인지 노루인지 둥지를 튼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물 많고 평지 있고 바위 있는 곳이라 사람이 터전을 잡기 딱 좋은 곳이다.

이제부터 하산길로 접어든다. 김종직은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 내려가니 길이 더욱 가파르고 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산기 해석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난다. 원문은 ‘徑由直旨而下’로 돼 있다. 강정화 교수의 해석대로 ‘지름길로 곧바로 내려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따라 수십 차례 답사했다는 유정자씨는 “백무동계곡 왼쪽 능선을 주변 지역민들은 큰새골 또는 곧은재 능선이라 불렀다”며 “이를 한자화하면 직지直旨라고 하며, 김종직은 그 곧은재 능선으로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곧은재 능선에서 백무동계곡으로 합류해서 실택리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강정화 교수 등 다른 해석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며, 루트도 조금 다르다. 요약하면, 세석에서 지금의 백무동계곡으로 하산했는지와 곧은재 능선으로 하산했는지로 정리된다. 또한 원문 그대로 해석하는 것과 동네사람들의 증인에 따른 것이냐의 차이로 풀이된다.

김종직은 바로 그 뒤 문장에 ‘나무뿌리를 붙잡고 돌 모서리를 밟으면서 수십여 리를 내려왔는데 모두 그런 길이었다’고 적고 있다. 지금 백무동 길에 대한 상세한 묘사 같다. 어느 루트가 맞는지 상상에 맡긴다.

김종직은 4박5일간의 지리산 유산을 마치는 감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이 산에 한 번 올라 유람하며 겨우 평소의 소원을 풀기는 했지만, 청학동을 찾아가고 오대사를 들르는 등 그윽하고 기이한 곳을 두루 유람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 산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런 곳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두자미杜子美(두보)의 방장산이 삼한에 있다는 구절을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진다.’

역시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으려는 심정이 반영된 것 아닌가 여겨진다.

지리산 산신

최고 명산인 만큼 마고·노고·성모천왕·위숙왕후·마야부인 등 다양한 인물 덧씌워져

1. 1965년 천왕제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씨가 천왕봉 아래 성모사 성모석상 앞에서 무릎 끓고 앉아 있다. / 2.지리산 법계사 산신각에 있는 산신도. 길고 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나오는 다른 산신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띤다.

지리산 산신에 대한 내용은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도 소개된다.

‘“성모는 세상에서 무슨 신을 일컫는 거요?” 하니,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입니다”라고 했다. 아! 이럴 수가 있을까? 서축과 우리나라는 수천 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 세계인데, 가유국의 부인이 어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읽어 보니, “성모가 선사에게 명하였다”라는 구절의 주註에 “지금의 지리산 천왕이다”고 했으니, 바로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가리킨다.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에 관한 전설을 익히 듣고서 자기 나라 임금의 계통을 신성시하고자 하여 이 설을 지어낸 것인데, 이승휴가 그대로 믿고서 <제왕운기>에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증명할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승려들의 허무맹랑한 말에 있어서랴. 또한 마야부인이라고 하면서, 국사國師 이야기로 더럽히고 있다. 업신여기고 불경한 것이 그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이 점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

지리산 산신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모습이다. 지리산에는 거론되는 산신만 해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등장한다. 마고할미·노고할미·천왕할미·반야·선도산신모(중국 여산신인 서왕모의 딸)·성모천왕(박혁거세의 어머니)·위숙왕후(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마야부인(부처의 어머니) 등이다. 한국 최고의 명산인 만큼 원래의 자연신에 덧씌워진 인격신도 많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실질적인 동이족과 한민족의 조상이자 최초의 국가로 간주한다.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가 바로 ‘마고지나麻姑之那’라는 것이다. 마고지나는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2,000년 전에 건국했다고 한다. 신뢰성은 둘째 치고라도 어쨌든 마고할미는 지리산 산신의 원형으로 봐도 무리 없을 것 같다. 원래 신의 세계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명칭을 근거로 추정할 뿐이다.

신라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리산 산신제는 천왕봉이 아닌 노고단에서 지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천왕을 지리산신으로 모시던 곳이 노고단이었다. 노고단은 ‘늙은 시어머니의 제사 터’란 말인데, ‘마고’란 말에 그 어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노고단이나 남악사가 아닌 천왕봉에서 고려시조인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시는 것으로 변모됐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은 왕이 된 뒤 어머니를 상징하는 왕후의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성모사라 했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지리산의 중심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옮겨질 뿐만 아니라 지리산 산신도 마고·노고·선도성모에서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와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인다. 국교인 불교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해석된다.

고려 태조 왕건의 명에 따라 성모사를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두면서 고려 때부터 지리산 산신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천왕봉의 주신인 ‘성모聖母’와 노고단의 주신인 ‘노고老姑’로 대표되는 산신의 형태를 띤다.

조선 <태종실록> 권28편에서 산천의 등제를 나누도록 한 내용은 기존의 산신을 그대로 답습한다.

‘예조에서 산천의 사전제도를 올렸다. 본조에서는 전조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천의 제사는 등제를 나누지 않았는데, 경내의 명산대천과 여러 산천을 점제에 의하며 제등을 나누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옥해독은 중사로 삼고, 여러 산천은 소사로 삼았다. 경성 삼각산의 신·한강의 신, 경기의 송악산·덕진, 충청도의 웅진, 경상도의 가야, 전라도의 지리산·남해, 강원도의 동해, 풍해도의 서해, 영길도의 비자산, 평안도의 압록강·평양강은 모두 중사였다.’

지리산 산신에 대해서 <세종실록>에는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으로, <경상도지리신>에서는 ‘지리산대대천왕천정신보살智異山大大天王天淨神菩薩’이라 하며, 이를 줄여 ‘대대천왕大大天王’이라 기록하고 있다. 천왕은 결국 천왕봉의 신령이라는 의미다.

조선시대에는 이전과 같이 더 이상의 천신화天神化나 신인화神人化된 새로운 산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을산신이라는 새로운 지리산 산신이 등장한다. <동국여지승람>에 ‘태을이 (지리산) 위에 거하니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명찰명찰 편에도 ‘지리산은 태을이 사는 곳으로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을은 천지만물의 출현 또는 성립의 근원인 우주의 본체를 인격화한 천제天帝로, 태을성은 곧 북극성이며, 병란, 재화, 생사 따위를 맡아 다스린다고 하는 신령한 별이다. 이 별을 신격화한 것이 태을성신이다. 조선시대는 불교국가인 고려와 달리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교와 성리학의 이념이 산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