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는 저잣거리에서 검을 사용하지않는다

산에관한이야기

산 위에서 내려와 산의 품에 안긴 산사람 남난희

남산동 2019. 1. 16. 22:18

 나의 산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엇던 산악인 남난희

나는 그의(하얀능선에서면) 글을 읽으며

수없이 첩첩산중 오지의 깊은산길에서 어둠속에 홀로 산을 오르며

그를(남난희) 생각하며 울컥

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함께 느껴보았다

홀로 깊은산중에서

고독과 적막감과 어둠속에서 두려움을 견디며 걸을때,,,,,

난 여자의몸으로 그가 이겨내엇던

극한의 상황을 생각하며 나역시

칠흙같은 어둠속에 홀로 첩첩산중의 길을 걸으며 이겨내었다,,,,(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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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중 몹시 추웠던 어느날 산능선에서
텐트치고 밤을 보내려는데 유난히 찬 기운이 강했다
.
발끝에서 머리카락 끝까지 외로움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

산을 내려가기에는 너무 어두웠고 더구나 길도 없었다
.
외로움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텐트 밖으로 나온 그녀
.

눈사람이라도 텐트 옆에 두고 자려고 눈을 뭉쳐보았지만

너무나 추운 날씨에 내린 눈이라 잘 뭉쳐지지도 않았다
.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었다
. "

당시 27세 처녀로 백두대간 단독도전은 불가사의
.
허리까지 빠지는 폭설, 굶주린 멧돼지 떼의 공격
,
밤새도록 텐트 속에서 울며 코펠을 두드렸던 그녀
.

'
그날밤이 그녀에게 얼마나 길고 무서웠을까
?'

남난희의 하얀능선에 서면의 글중에,,,

사진 

 남난희는 스물여섯 어린나이로  눈 펑펑 내리는 한겨울에 백두대간을 혼자 걸어 완주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여성 최초‘’단독 종주’ 같은 화려한 수식어를 붙여줬다.

 

오래지 않아 그는 다시 해발 7455m의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봉에 올랐다.

 

또다시‘ 여성 세계 최초’라는 수사가 따라왔다.

 

여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던 설악산 토왕성 빙벽폭포도 올랐다. 역시 여성 최초였다.

‘여성 최초’라는 이 어려운 수식어가 마치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에게도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람과의 사귐에 능숙하지 못해 상처 입고,

 

도시 생활에 지쳐가던 그는 결국 그토록 좋아하던 등산도 그만두고

 

지리산 자락 한쪽인 경남 하동으로 삶의 터를 옮겨갔다.

 

그렇게‘ 전설’에서 내려와 평범한 시골 아낙네로 살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여 년 전이다.

녹차 덖고 장 담그는 시골 아지매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귀농이니 귀촌이니 하는 거창한 생각을 하고 지리산 자락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도시의 삶이,

 

도시의 사람들이 버겁고 힘들어서 엄마에게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자연으로부터,

 

산으로부터 위안을 얻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 즈음 만나 짧은 인연을 맺었던 남편의 제안으로

 

지리산 아래 마을로 이사를 한 것이 시골살이의 시작이었다.

남쪽 끝 하동 청학동에서 시작한 자연 속 삶은

 

북쪽으로 한참을 내달려야 하는 강원도 정선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하동으로 돌아와서야 자리를 잡았다.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황장산 바로 아래 마을이었다.

“우리 집이 마을 꼭대기에 있는 집인데,

 

남향인 데다 위치도 높아서 맑은 날이면

 

지리산 능선은 물론 인근의 전남 광양 백운산까지 보여요.

 

집 뒤도 산으로 둘러싸여있으니 그야말로 산의 품에 안겨 있는 셈이죠.

 

” 산의 품에 안겨 그가 하는 일은 녹차를 덖고 장을 담그는 것이다.

 

집 앞 텃밭에서는 배추며 무, 고추 같은 먹을거리들을 재배한다.

 

하동에 사는 어지간한 아지매들이면 다 하는,

 

그가 절대‘ 최초’가 될 수 없는,

 

그렇지만 그를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일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그는 집 뒷담 옆에 조그맣게 만들어 둔 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덖고, 말려서 차를 완성한 다. 산에서 따온 야생 찻잎으로 녹차를 만들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가 절대 놓치지 않는 원칙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녹차를 만든다는 것이다.

 

차밭을 가꾸는 것도, 찻잎을 따는 것도, 찻잎을 덖고,

 

말리는 과정까지 모두 직접 혼자서 한다.

 

그야말로‘ 남난희표 녹차’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작은 차밭, 적은 양의 녹차를 고집한다.

 

규모가 커지면 혼자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이 만들면 돈도 더 많이 벌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이 종종 물어온다.

 

그러면 그슴 답한다

 

. 자연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인간이

 

자연에게 보답할 수 있는 최선은 덜 쓰고 덜 버리는 것이라고.

 

그러니 내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만큼만 만들면 되는 것을 무엇하러 욕심을 부리겠느냐고.

 

녹차가 인기를 끌면서 동네 사람들이 너도 나도 밭을 갈아 엎고 논을 메워 차나무를 심을 때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장 담그는 것도 마찬가지다

 

. 매년 11월이면 콩 삶는 것에서 시작하는 장 담그기도 콩 열 가마 분량을 넘기지 않는다.

 

그 정도의 된장이며 간장을 팔아 얻는 돈이 그와 아들이 생활하는 데 필??,

 

딱 그만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 담그는 것도 주변 지인들과 함께 잔치를 치르듯, 축제를 열듯 즐겁게 한다.

물 빠진 풀잎처럼 가벼운 삶 화개에 자리 잡은 뒤 남난희의 삶은 단순하고 가벼워졌다.

 

하동에 내려온 초창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져 이제 그의 집을 찾는 사람도 줄었다.‘

 

여성 최초’를 좇아 다니던 언론들의 관심은 그보다 더 일찍 사그라들었다.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만든 소찬이면 충분하고 직접 덖어 만든 녹차면 더는 필요한 것이 없는,

 

그가 바라는 자연 속 소박한 삶이 그제야 가능해졌다.

그래서 요즘 그는 아침 해와 함께 시작한 하루를 지는 해와 같이 마무리하는,

 

자연과 하나 된 삶을 살고 있다.

 

새벽 동이 틀 무렵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가볍게 산책하듯이 뒷산을 오르고 기도와 명상을 위해 108배를 한다.

 

마당을 쓸고 마루를 닦으며 집 안팎을 건사하느라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햇볕 좋은 날이면

 

툇마루에 나와 앉아 우두커니 해바라기를 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마음이 내키면 하루 종일을 책 읽으며 보내기도 한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온전히 살아나는 온갖 자연의 소리와 냄새를 만끽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의 시골살이가 만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시골의 삶이라는 것이 워낙에 게으름을 용서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는 스스로 시골살이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먹을거리를 직접 해결하는 것은 물론 겨울 추위를 견디게 해줄 장작을 마련하는 것도 직접 해결한다.

 

돈으로 해결하는 일은 최소화하고 뭐든 직접 자기손으로 한다.

“도시에서의 생활처럼 편하지는 않죠.

 

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고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시골생활의 즐거움이에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거든?.”

 

게다가 하동으로 내려온 뒤에는 온갖 욕심도 사라졌다.

 

갖고 싶은 것도, 바라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모두 사라졌다“.

 

물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이어서 참 좋다고 그는 말한다.

 

자연이, 산이 그에게 준 선물일 게다.

정복의 대상에서 소통의 대상으로 도시를 떠나며 산을 버렸다 했지만

 

실상 그가 버린 것은 산이 아니라‘ 등산’이었다.

 

더 이상 산을 정복해야 할,올라가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기로 했으니 등산을 버린 것이다.

 

그 대신 아예 산의 품 안으로 뛰어들어 버렸으니,

 

그는 이를‘ 입산’이라고 부른다.

산 아래 살면서 매일 산을 보고 접하니 굳이 올라가지 않아도 산이 마음에 들어왔다고 했다.

 

죽을힘을 다해 산에 오를 때는 절대 채워지지 않던 그리움이 그제서야 채워졌다고 했다.

 

산의 품속에서 넉넉해진 자신을 볼 때면 고마움도 느낀다고 했다.

 

자연에서의 삶을 시작하고서야 산이 산 자체로서 오롯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는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길 줄 알게 됐다.

 

처음 혼자서 백두대간을 종주했던 그때의 절박함이나

 

히말라야를 오르던 시절의 고통스러운 간절함이 아닌

 

산과 소통하고 산을 온몸으로 이해쿇며 오르는 산행을 시작한 것이다.

 

굳이 책을 통해‘ 낮은 산이 낫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산악인 남난희이기보다 산사람 남난희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