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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관한이야기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 타계] ‘히말라야의 기록자’, 산악사의 기록이 되다

남산동 2018. 6. 2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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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부터 히말라야 등반 기록 시작…‘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 일생의 업적

평생 히말라야 등반 원정대의 역사를 기록하며

‘히말라야의 기록자’로 불린 엘리자베스 홀리Elizabeth Hawley(1923~2018)

 여사가 1월 26일(네팔 시간) 네팔 카트만두에서 향년 9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녀는 사망하기 1주일 전부터 폐렴으로 카트만두의 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히말라야 고봉은 물론

, 베이스캠프조차 올라보지 않은 비산악인이었지만

 평생 히말라야 원정대의 활동을 기록하면서 히말라야 등정 분석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로 통했다.

1923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홀리 여사는 미시건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미국의 역사와 국제 문제, 사회 철학 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46년, 그녀는 포춘Fortune지의 기자로 취직했다.

그녀는 10년간 포춘지에서 일하다가 1957년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2년간 구소련(러시아)과 동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등지를 여행했다

. 이때 우리나라도 방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는 매주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여행을 기록하는 것을 즐겼다. 

그녀가 히말라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59년. 여행 차 네팔 카트만두에서 몇 주간 머무는 동안 히말라야의 대자연에 매료되고 말았다.

 홀리 여사는 “여비가 떨어져 일단 귀국했는데

, 미국에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사먹다가 불현듯 이곳에서 사는 삶은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때의 심경을 밝혔다.

결국 그녀는 1960년 네팔 카트만두로 이주해  <타임 라이프Time Life>라는 잡지의 임시 특파원으로 일했고,

 1962년부터 로이터통신 특파원으로 일했다.

 196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히말라야 등반대들의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그녀는 당시 한 산악인과 연인 사이였고,

그 산악인과 헤어진 뒤에도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남아 산악 관련 일을 하게 됐다는 설도 있다.

 사랑 때문에 ‘히말라야의 역사’가 됐다는 설이다.

1960년대 이후의 히말라야 고봉 등정기록은 거의 모두 홀리 여사의 손으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록 수집을 위해 1만5,000건에 이르는 산악인을 인터뷰했으며

, 특히 1905년부터 2017년까지의 히말라야 등정 기록을 수집해 분류한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The Himalayan Database’는 홀리 여사의 일생의 업적으로 손꼽힌다.

히말라야를 사랑한 ‘미스 홀리Miss Hawley’

[추모 |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 타계]  

 

1 홀리 여사는 14좌 최초 등정자로 ‘산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라인홀트 메스너와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메스너에 대해 “처음엔 텁수룩한 머리 스타일이 시골뜨기같이 보였다”고 말했다.

 / 사진 출처 www.alpinist.com. 2 생전의 홀리 여사. 낡은 하늘색 폭스바겐 비틀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았다.

/ 사진 출처 www.mountainguides.com. 3 네팔 카트만두에 차려진 홀리 여사의 분향소.

 4 홀리 여사가 등정을 마친 히말라야 등반대를 만나 인터뷰하는 모습. / 사진 출처 www.alpinist.com.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에는 중국과 인도 국경을 포함해

약 460개의 히말라야 봉우리에 2만 건이 넘는 원정대의 등반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담겨 있다.

 홀리 여사는 이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원정대를 직접 만나 등정 진위를 가려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네팔 관광청에서 히말라야 등반 허가를 받은 원정대를

 등반하기 전과 등반 후로 나눠 두 번씩 만나 등반 계획과 결과를 인터뷰하며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실제 등정여부를 판가름했다.

 그래서 산악인들은 등정 후 그녀와의 인터뷰를 ‘두 번째 정상Second Summit’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만여 명의 산악인을 만나면서 쌓아온 데이터베이스와 경험을 통해

 정확하게 등정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에 등반가들은 네팔 관광청의 등정 인정보다 홀리 여사의 인정을 더 가치 있게 여기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초등자이자 그녀와 막역한 사이였던 영국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홀리 여사를 ‘산악계의 셜록 홈스’라고 불렀다.

네팔의 트레킹여행사 운영자이자 환경주의자인 다와 스티븐 셰르파Dawa Steven Sherpa는

 “등정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네팔 정부가 해야 하지만 홀리 여사만큼 엄격하거나 정확하지 않다.

 그녀의 가장 큰 공헌 중 하나는 등반가의 양심을 유지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2009년 오은선 대장의 캉첸중가 등정이 홀리 여사의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오 대장과 셰르파 등을 인터뷰한 후 “

오 대장의 정상 사진은 정상이 아닐 수도 있다”면서 등정 여부에 ‘논란이 있다disputed’고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논란이라는 기록은 말 그대로 기록일 뿐 나는 오은선의 등정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한 방송사를 통해서 “한국에서 그녀의 등정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같은 한국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녀는 생전에 “나는 심판자가 아니라 기록자일 뿐 아무도, 어떤 것도 판결하지 않는다”고 말해 왔다.

 홀리 여사와 인터뷰를 했던 산악인들도

“그녀는 철저하게 팩트fact만을 물을 뿐 산악인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이런 홀리 여사의 업적을 기려 네팔 정부는 2014년 네팔 북서부에 있는 한 봉우리를 ‘피크 홀리Peak Hawley’라고 명명했다

. 하지만 그녀는 2016년 내셔널지오그래픽과 인터뷰에서

“그 산에는 이미 포타 노스Pota North’라는 이름이 있었고, 산 이름은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으면 안 된다”며

“내 이름을 따서 ‘피크 홀리’란 이름을 붙인 건 정신 나간 짓”이라고 일갈했다.

‘히말라야의 산 증인’이었던 홀리 여사의 기록들은

조카인 마이클 홀리 레오나르드에 의해 수집되어 미국 알파인 클럽American Alpine Club 도서관에 기증,

 보존될 예정이다. 여기에는 그녀의 서신을 비롯해 엽서 수집품, 1963년의 ‘American Everest File’ 등이 있다.

홀리 여사의 일생의 업적인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는 원래 CD를 구입(69.95달러)를 하는 방식이었지만

 지난해 11월부터 온라인(www.himalayandatabase.com) 상에서 무료로 데이터베이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 자신을 ‘미스 홀리Miss Hawley’라고 부르지 않으면 화를 냈던 홀리 여사.

 네팔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해 산 외국인 1세대인 홀리 여사는 평소에도 늘 “나의 고향은 네팔이며,

 이곳에서 죽는 게 당연하다”고 말해 왔다.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졌고, 위대한 ‘히말라야 기록자’는 세계 산악사의 기록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