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는 저잣거리에서 검을 사용하지않는다

산에관한이야기

3,000산 오르고 3,000편 시조 쓴 김은남 시인

남산동 2021. 2. 2. 17:04

바위 뚫는 물방울의 집념으로 쌓은 시탑

3,000산 산행의 거름이 된 자료들. 5만분의 1축척 지형도 남한 전체 분량, 3,000편의 시조, 책으로 펴낸 시조집들.

땀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 30년간 발품으로 시조를 쓴 산꾼이 있다. 오르는 산마다 시조 한 편을 쓰는 고행에 가까운 작업, 그 산에서 가장 고운 돌을 하나 골라내는 마음으로 시탑을 쌓았다. 시조집 <삼천산 시탑을 위하여>를 펴낸 김은남(78) 시조시인이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산행을 한 번 할 때마다 시조를 쓴 것이 3,000편이 넘었다.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인 그가 그동안 펴낸 시조집 <일천산의 시탑>을 비롯해 7권에 이른다. 놀라운 것은 오르는 산마다 시 한 편만 쓴다는 것. 그가 오른 3,000산 각각의 산에 관한 시조다.

한 달에 두 번만 등산을 하더라도 등산마니아에 속하는데, 매주 이틀 산행하고, 매주 2편의 시조를 쓴 것이다. 이렇게 매주 2편의 시조를 30년간 썼을 때, 산술적으로 3,000편의 시조가 나온다. 직장생활을 감안하면, 일하는 시간 빼고는 등산과 시조를 쓰는 데 다 바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등산매체 기자들과 산꾼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1990년대 4년간 일간지에 ‘시조시인 산행기’를 연재했다. 2013년에는 월간<산>에서 발행한 <4000산 등산지도> 등산로 기록 작업에도 동참해, 명산과 무명산 가릴 것 없이 우리나라 구석구석의 등산로를 표시했다.

30년 동안 3,000개의 산을 오르고, 3,000편의 시조를 쓴 김은남 시인.

봉우리 헌터들 모임 만산회

 

봉우리 헌터들 사이에서도 터줏대감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봉우리 헌터란 오르는 봉우리 개수를 세어 경쟁하는 다산多山 산행 마니아들로, 그중 선두를 다투는 이들이 2008년 만든 모임이 만산회萬山會다. 당시 1,000개 이상의 산을 오른 사람들만 가입할 수 있게 했으며, 창립멤버인 김은남 시인이 현재 6년째 회장을 맡고 있다.

만산회 멤버 중에는 1만 개 이상 봉우리를 오른 사람도 여럿이다. 그들에 비하면 오른 봉우리 개수가 적은 편이지만, 이면에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쌓여 있다.

우선 가보지 않은 새로운 산행 대상지를 찾아야 하는데, 등산로가 있는 대부분의 산은 올랐기에 지형도만 보며 새로운 산행지를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산행을 할 때도 정상 인증 위주인 다른 봉우리 헌터와 달리, 시조를 쓰기 위해 마을 입구부터 산의 생태와 풍경까지 모두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다.

빽빽하게 메모한 수첩과 사진은 하산 후 시조를 쓰는 초석이 된다. 3,000편의 시조를 썼으니 내용이 비슷할 법도 하지만 늘 산마다 새로운 내용을 담는다.

충북 진천 무제산을 찾은 김 시인. 산행 중 메모를 하여 시조를 쓸 때 참고한다.

정성으로 쌓은 시탑

시조 제목은 산 이름이며, 산의 특징적인 주제를 잡아 시조로 풀어낸다. <삼천산 시탑을 위하여>에는 총 6부 120편의 시조가 담겼다. 1부는 그 산의 자연, 2부는 산의 역사적 인물, 3부는 그 산에서 벌어진 역사적 전투, 4부는 초등학교 교가 속의 산, 5부는 재미있는 독특한 이름의 산, 6부는 김은남 시인이 직접 이름을 지은 산으로 묶었다. 그의 시조 ‘대곡산’을 감상하자.

‘목련꽃 뚝뚝 지는 만날고개 향합니다 / 치성줄 겹겹 두른 들머리의 팽고목 / 곰삭은 남녀 두 장승, 전설 적은 안내판이 // 가난이 죄가 되어 팔려간 시집살이 / 눈시울 절로 젖는 고갯길의 옛 사연 / 지금도 팔월열이레 출향벗들 모입니다 // 한맺힌 사연들이 진달래로 벙급니다 / 능선길, 자락자락… / 핏빛 더한 꽃모닥불 / 구성진 두견새 소리 나그네를 울립니다 <중략> 해마다 날을 정해 대곡산 찾으리다 / 못다한 사랑 찾아, 잃어버린 희망 찾아 / 멀잖아 이별할 이승 / 짧은 삶을 아끼며’

경남 창원시 합포구 와 회원구에 걸쳐 있는 대곡산(516m)에 관한 시조다. 대곡산의 여러 가지 면을 이토록 다각도로 살펴 쓴 작품이 있을까. 작품 수 채우기 위해 대충 쓴 시조는 아니라는 것.

산 이름이 없는 무명봉은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한다. 가령 시골마을 뒷산은 산 이름이 있는데, 산행을 해보면 마을에선 보이지 않지만 그 산의 주인이 되는 주봉이 따로 있다는 것. 중요한 봉우리라고 판단될 때는 무명봉에 직접 이름을 붙인다.

인근 마을의 역사적 근거와 지형과 생태 등을 고루 참조해 정한다. 이를테면 강원도 홍천군의 두촌면·내촌면·화촌면 경계에 있는 봉우리는 ‘삼촌면산’이라 지었다. 주관적인 잣대보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름 지은 것.

산행을 마친 후에는 이틀 동안 시조를 쓰는데, 시상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는 한 달을 고민하기도 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일주일에 이틀 이상 산행은 계속 한다. 이렇듯 그의 3,000편 시조에는 단순히 숫자만으로 평가하기엔, 보이지 않는 고행과 노력이 담겨 있다.

경기 안성 황석골산 정상에 올랐다. 그가 찾는 산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산이 대부분이다.

최연소 조흥은행 지점장

그는 젊은 시절부터 뭐든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1963년 조흥은행(지금은 신한은행으로 합병)에 공채로 수석 입행했으며, 가장 일찍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행원이었다. 성실하고도 꾸준한 노력이 인정받아 최연소 지점장으로 발탁되었다.

일에만 몰두하던 그를 바꿔놓은 것은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 ‘조국강산’이었다. 이 땅의 명산을 나라사랑의 마음을 담아 읊은 시조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오르는 산마다 시조를 쓰자고 결심한 것도 이은상 선생의 ‘조국강산’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또한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꿈이 자신의 책을 출판하는 것이었기에 흩어진 조각들이 일순간 맞춰지며, 산을 오르고 시조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김은남 시인은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벼락 맞은 듯 감동 받았다”며 “나도 조국에 대한 작품을 쓰자. ‘조국이 산이다. 조국 번영을 위한 지신밟기 산행을 하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1991년부터 산의 개수를 헤아리며 시조를 쓰기 시작했고, ‘3,000편의 시조를 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불도저처럼 목표를 향해 내달렸으며, 산에 더 자주 가기 위해 직장생활도 남들보다 일찍 정리했다. 1996년 정년을 6년 남겨놓은 시점에 조기 명예퇴직을 하고, 마음껏 산을 누볐다.

용인 건지산을 찾은 김은남 시인. 숱하게 많은 메모와 사진촬영을 바탕으로 시조를 쓴다.

큰 상처 준 악귀산

그를 등산객에서 등산 전문가로 거듭나게 한 건, 만산회 창립멤버인 이종훈(84)씨의 영향이다. 1994년 산에서 만난 이종훈씨는 5만분의 1 축척 등고선 지형도와 나침반을 들고 산행을 하고 있었다. 이씨의 정확한 독도법에 감탄한 그는 축척별 지형도를 모두 구입해 나침반을 들고 제대로 산행을 하게 되었다.

숱하게 산을 누빈 등산 고수이지만, 산에서 크고 작게 다친 횟수가 100회가 넘는다. 가장 크게 다친 것이 1995년 가평 악귀산에서였다. 산 이름처럼 그에겐 악운이 도사린 산이었다. 비탈에서 살짝 미끄러지며 손을 짚었는데 날카로운 바위에 찔려 25바늘이나 꿰매었다.

당시 가평읍내 병원을 찾았으나 상처가 깊어서 치료할 수준이 못된다고 하여 서울 강남의 병원까지 와서 겨우 치료 받았다. 손에 붕대를 감고서도 일주일 뒤 곧장 산으로 향했다. 김 시인은 “이런 일들이 나를 단련시켜주었다”고 한다.

3,000산을 올라 3,000편의 시조를 쓴다는 목표를 이뤘지만 그는 여전히 일주일에 이틀은 산행을 하고 있다. 팔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50대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그렇게 많은 산을 다녔지만 무릎이 멀쩡해 스틱도 쓰지 않는다. 20대부터 78세까지 60㎏ 체중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 건강의 비결이다.

체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음식과 술에 있어 절제”를 했기 때문이다. 애주가이지만 한번 술자리를 가지면 이후 3일은 술 먹지 않으며, 과식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젊을 적 주량인 소주 2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단다. 김 시인은 “인생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며 “절제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은남 시인의 시조에는 산에 깃든 역사와 인물, 산세, 생태, 지명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전집 출판 위해 다시 도전

 

김 시인의 최종 목표는 전체 시조를 묶은 전집을 내는 것. 지난 10월에 출판된 <삼천산의 시탑을 위하여>는 “시전집을 내기 위한 포석 혹은 맛보기”라고 얘기한다. 사실 그는 “올해가 아닌 몇 년 전에 3,000편의 시조를 완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초창기에 쓴 시조가 부끄러워 한동안 퇴고에 매달렸다”고 한다.

3,000편의 시조를 전집으로 내는 것은 방향성이 다른 새로운 도전이다. 현실적으로 방대한 분량의 시조를 책으로 출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출판사를 비롯 스폰서를 알아보고 있으나 아직은 성과가 없다.

그래도 김은남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3,000개의 산을 오르고, 3,000편의 시조를 쓰는 30년 동안의 작업은 빗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 과업이었다.

오늘도 그는 부지런히 수첩에 메모를 하며 산행하고 있거나, 책상 앞에서 시조를 쓰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시탑이 지금도 솟구쳐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