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난희.
그녀에게서는 히말라야 옛 조상의 혼이 느껴진다.
히말라야 설원과 티벹고원을 누비던 옛 조상의 혼.
지리산 천왕성모의 영혼이 담겨있는 듯한 그녀의 삶.
요즘 무박 주말산행 붐으로 대중화된..백두대간 종주
백두대간을 구간 구간 나누어 산행하는 붐이 일고있다.
우리나라 국토의 등뼈에 해당하는 산맥이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 첫 종주자는 놀랍게도 여성.'
현재, 지리산 전설 속 마야부인 같은 삶.
2년 반 결혼생활 후 스님이 되어 떠난 남편.
그녀는 아들 기범과 함께 화개골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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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난희! 그녀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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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년 경북 울진 출생, 1981년 한국 등산학교를 수료.
1984 년 1월 1일부터 76일 간 국내 최초로 백두대간 종주.
1984년 3월 16일, 끝내 동계 여성 단독 백두대간 종주를 성공.
.................그녀의 술회...................
"그때는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이 있기 전이었다
유사 이래로 눈이 가장 많이 왔다는 그해 겨울
혼자서 76일 동안을 산에서 먹고, 자고, 걸었다.
20대 후반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을까?'
정신과 육신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를 경험하는 일
그 산행으로 최고의 극한 한계를 모두 경험한 그녀.
아직도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때 생각이 난다는 그녀.
"백두대간 산행 중 몹시 추웠던 어느날 산능선에서
텐트치고 밤을 보내려는데 유난히 찬 기운이 강했다.
발끝에서 머리카락 끝까지 외로움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산을 내려가기에는 너무 어두웠고 더구나 길도 없었다.
외로움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텐트 밖으로 나온 그녀.
눈사람이라도 텐트 옆에 두고 자려고 눈을 뭉쳐보았지만
너무나 추운 날씨에 내린 눈이라 잘 뭉쳐지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었다. "
...............................................
당시 27세 처녀로 백두대간 단독도전은 불가사의.
허리까지 빠지는 폭설, 굶주린 멧돼지 떼의 공격,
밤새도록 텐트 속에서 울며 코펠을 두드렸던 그녀.
'그날밤이 그녀에게 얼마나 길고 무서웠을까?'
감기 몸살 중에도 연료를 아끼려 혹한과의 싸움.
전인미답 코스라 진로 막는 잡목 숲에 악전고전.
식수가 귀한 눈밭에 허리까지 빠지며 겪는 갈증.
그 눈밭을 러쎌로 헤치며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
인간 인내심의 한계점에서 엄습해 온 졸음과의 사투,
중도에 하산하고 싶은 마음 억누르며 '자신과의 싸움'.
칫솔 반 토막 내서 쓸 만큼 큰 배낭 무계와의 싸움.
멧돼지 덫에 걸려 나무 위에 꺼꾸로 매달렸던 일화.
그 덫이 발목이 아닌 등산화에 걸렸기에 무사 탈출.
식수조차 귀한 산속에서 세수할 물이 있을 리 만무.
생리기에도 쉴 곳이 없고 몸 씻을 물조차 없는 산 속.
너무도 목욕하고 싶은 마음에 화전민가에 들렀던 그녀.
"총각은 군대 갔다 왔는가?"
"....................."
목욕한 후 다시 홀로 산으로 올라가는 발걸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도 울며 다시 오른 산속.
오지마을 화전민에게 오해받을 만큼 장정 체격.
큰 배낭을 짊어진 탓에 누구도 여자로 볼리 만무.
여자이지만 여자 대접 받지 못할 때가 서러웠던 듯.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여성다운 여성, 남난희'.
그런 그녀의 마음을 첫 만남에서 사로 잡았던 남자.
지리산에서 상경한 청학동 댕기머리 총각와 데이트.
두 사람은 첫만남에서 밤새도록 술한잔으로 데이트.
새벽녘 처녀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집에 바래다 준 청학동 총각.
그 당시 밤새 술을 마셔도 대작할 남자가 없을 만큼 철녀인 그녀.
그녀를 연약한 여자로 여기던 그 청학동 총각의 청혼에 결혼 결심.
그녀를 순수하게 여자로 대한 남자는 그가 처음.
그것이 그녀가 청학동에 둥지 튼, 운명적인 인연.
그곳에 찾아가 내가 만난 그녀의 첫인상은 여성다웠다.
둥굴레차를 권하며 섬진강이 오염될까 봐 걱정하는 모습.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몸에 배인 그녀는 정말 산악인 답다.
1986 년 여성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봉(7455m) 등정.
1989 년 '금녀의 벽'이라는 설악산 토왕성 빙벽 폭포를 두 차례 등반.
<하얀 능선에 서면> <낮은 산이 낫다> (학고재·2004) 책 3 권을 펴냄.
1991년 강원도 정선으로 들어가 삼 년 간 '정선 자연학교'에서 교장.
'정선 자연학교'는 임대한 폐교에서
도시 학생들에게 여름철 자연 교육장.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산에 오르고, 들풀을 뽑고, 돌탑 쌓고, 물놀이했다.
자라나는 2 세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천연 식단으로 건강 교육.
하지만, 태풍 루사로 인해, 그녀가 2년 반 쏟았던 정성은 물거품처럼.. 폐허.
그 후 그녀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전통 찻집 '백두대간'을 운영.
그 실내장식을 어떻게 할지 고민 중에 대동여지도 생각이 났고,
이우형 선생 도움을 받아 대동여지도 한 점을 찻집 천장에 붙였다.
그녀는 아들 기범이와 함께 지리산 화개 장터 위쪽 화개골에 산다.
그녀는 스님이 된 후 그녀 곁을 떠난 남편의 도움으로 그곳에 정착.
그 흙집에서 증제차, 녹차, 가죽나물, 남난희 표 된장을 제조하며 생활.
그곳에 이사온 후 남성용 사각팬티와 러닝을 즐겨 입게 되었다는 남난희.
남성같은 강인함보다 옷을 입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편안함 때문이란다.
그녀는 천왕성모처럼 만난 남편과 헤어져, 마야부인처럼 살아가는 산 전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얼마나 행복한지....세상에 그 어떤 향수가 나무 타는 냄새에 견줄 수 있을까 싶다. 여름에는 대문을 걸어 잠그기만 하면,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 된다. 맨발로 마당을 서성이거나 아예 마당에 퍼 질러 앉아서 땅기운을 그대로 받으며 풀을 뽑기도 하고, 더우면 시원한 우물물로 몸을 식힌다. 그리고는 그냥 발가벗은 채로 마당을 서성이며 몸을 말리기도 한다. 대문을 활짝 열어 두어도 들어올 사람은 없다." ---남난희 저 '하산' 중에서...248쪽 글 인용.---
대나무 숲을 지나 지리산 자락에 안긴 그녀의 집.
그녀가 외출했을 때면 대문에 못 하나 걸린 문고리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잠금 장치가 그녀의 심성을 대변.
봄이면 집 주변에서 나물을 캐고, 대밭에서 죽순을 딴다.
텃밭에서는 농약이나 비료를 쓰지 않고 기른 고추와 감자,
무, 배추, 상추, 호박, 오이, 토마토를 여름 가을에 수확.
자연에서 수확한 그대로 먹거나 데쳐서 먹고,
양념도 담근 간장이나 된장을 조금 넣는 정도.
가죽나물, 음나물, 취나물, 잰피, 산초 장아찌.
손님이 오면 잡곡밥을 안치고 두부를 숭숭 썰어 넣고
청국장을 끓여 내고 장독에서 묵은 김치를 내오는 그녀.
틈틈이 캔 쑥부쟁이와 머위나물 그리고 석빙고의 장아찌.
평소 그녀의 밥상은 소박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밥에 된장과 김치 또는 된장찌개와 나물 비빔밥.
햇빛에 탄 피부와 순박한 웃음에서 피어난 건강함.
그녀는 농사를 지을 때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자연에서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
그것이 자연에 기대어 살고싶은 그녀 마음의 자세이다.
약간 모자란 듯, 사는 것이 자연에 가까이 가는 방법
풀잎, 돌멩이 하나도 자연을 아프지 않게 하려는 마음.
이웃과 나눌 정도의 수확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그녀
된장을 팔아 최소한의 생활비 정도에 만족하려는 그녀.
자신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만큼만 만들어 판매를 한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지만 돈을 주고 사람을 쓰지는 않는다.
“된장은 햇볕과 공기, 물 자연의 힘을 빌려 담그는 거예요.
거기에 세월의 맛, 옹기의 맛이 더해지고, 내가 기운을 보태요.
발효 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기가 좋아야 만든 음식 맛도 좋아져요.
때문에 옹기에 담을 때는 맨손으로 퍼 담아요.
제 건강한 기운이 장에 배어 전해지길 바래요.”
차 역시 집 뒤 언덕에 있는 야생 차밭에서 수확한다.
그녀를 찾아오는 손님과 함께 나눌 정도면 족하단다.
그녀는 도시에서 살 때나 지금이나 차를 즐겨 마신다.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에요.
자연이 제공해 주는 먹거리가 있는 시골이라 가능한 일.
제가 아는 사람들과 나눠 먹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한 일.
정성 다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건강해지면 저도 좋죠.”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가지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는 그녀.
진정 욕심없는 그녀는 산에 사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2005년 현재 49 세인 그녀에게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소망.
38선에서 멈췄지만 백두산까지 완주하고 싶은 백두대간 종주.
국내 최초로 완주할 기회가 그녀에게 주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산에서 살어리랏다.
"내가 한국 여성의 대표 산악인이 되는 계기는
1984년 1월 1일 시작한 단독 태백산맥 종주등반
그때는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이었다.
부산이라는 땅덩어리가 생기고 난 후
눈이 가장 많이 왔다는 그 겨울이었다.
혼자서 76일을 산에서 먹고 자고 걸었다.
20대 나이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대신 너무 힘들었고 외로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런 푸념은 뒷발자국으로 남긴 채
1984년 3월 16일에 끝끝내 산행을 마쳤다.
사람들은 성공이란 단어를 썼고 나는 허탈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던 것 같다.
정신과 육신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를 경험하는 일
그 최고의 극과 극을 모두 경험한 것은 행운이었다.
그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견딜 수 있는 끈기가 생겼고,
당당하게 맞설만한 힘이 생겼다.
'어느새, 산행은 내 삶의 기준.'
그후, 매일 밥 먹듯 숨을 쉬듯
암벽을 올랐고, 빙벽을 올랐다.
그리고, 히말라야까지도 올랐다.
어쩌다보니 남보다 앞서 올랐지만
그것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산을 가든지,
어떻게 산행을 하든지
그것은 나의 의지지만
산이 나를 받아 주지 않으면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산 앞에 최선.
산 앞에서 겸손하고자 했고,
고마워했고, 당당하자고 했다.
나 자신에게 당당해야
산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으니까!
산에게 선택된 자로서
부끄러운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산이 향상 그리웠다.
지금 내개는 "도전"이란 단어가 너무 생소하다.
적어도 산 앞에서는 도전이라는 단어는 안 된다.
인간이 자연에게 도전이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굳이 도전이라 해야 한다면
자신과의 도전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의지, 용기, 기술, 힘 등.
요즘 자연을 벗삼아 산속에서 살아보니
더욱 그런 사실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예전처럼 강도높게 산행하지 않지만
여전히 산을 편한 마음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예전에는 최초 최고 타이틀이 붙은 등산을 했다면
이제는 그저 입산이고 편안하게 산과 만나는 것이다.
과거 목적 때문에 산의 한부분에만 집착했다면
지금은 산 안에 모든 것과 교류하고 산과 합일.
산이 곧 나 자신이고, 내가 곧 산의 일부분인듯.
오늘처럼 눈이 쌓인 날이면 지난날 열정이 생각난다.
어느 겨울날 산능선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려는데
그날은 유난히 찬 기운이 강했고 외로움이 엄습했다.
손끝, 발끝에서부터 머리카락 한올 한올까지
숨막힐 것 같았지만 하산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더구나 길도 없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텐트 밖으로 나와 눈사람이라도 옆에 두고 자려고
눈을 뭉쳐보았지만 너무 추워 눈도 뭉쳐지지 않았다.
그때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 뿐이었다.
그당시 힘겨웠던 산행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고행이 아니라 수행이었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산에게, 자연에게 감사하며 산다."
자연에서, - 남난희.
자연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욕심은 절대 금물이다.
언제부턴가 나의 삶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또 어느 곳에도 가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
물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이다.
참 좋다.
....................
....................
76일간 백두대간을 단독 종주한 여성 산악인
여성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 등정
그러한 그녀가 산을 타는 방법은 옛날과 다르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조바심치지 않고
바삐 걷지 않고 중간에 하산을 해도 상관없다.
예전에 등산을 했다면 지금은 入山한다는 그녀.
그녀가 최근 펴낸 에세이 ‘낮은 산이 낫다’
그러한 삶의 변화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여성 산악인끼리의 에베레스트 등반 계획 좌절
잠적, 결혼, 출산, 서울을 벗어나 지리산으로 이사,
이혼, 강원 정선자연학교 교장,
태풍 루사로 자연학교 풍비박산,
다시 지리산 화개골에 정착한 그녀.
삽시간에 생명을 앗아가는 강가푸르나의 돌풍보다
자연학교를 날린 태풍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깨달음.
이십대에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갈증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성취욕에 쫓긴 삶
그게 자신과 남에게도 상처를 주었다는 그녀.
이제 그녀는 산을 오르는 대신에 산자락에 살며
찻잎을 덖고, 콩으로 메주를 빚고 된장을 만든다.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지리산 대자연과 아이.
풀 두번 매준 정도여도, 콩은 잘 자라준다.
'애인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녀의 아들
비오면 까치 잠자리가 무사할까 걱정하는 아이
한 해를 시작하는 날과 두 사람의 생일날
해마다 그녀는 아이와 맞절 의식을 치룬다.
아이가 있기에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그녀.
지나간 삶이 산으로 오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아무 것도 원하는 바 없는 지금이 평안한 삶.
그게 지금의 삶이고 그 평안이 참 좋다는 그녀.
집 앞뜰에 가지런히 정렬한 수십 개의 장독독.
평상에 앉아 있으면 뜰악을 날아다니는 반딧불
구름 속에 가려있다가도 불쑥 나타나는 훤한 달빛.
서울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달빛보다 두 배는 밝은듯.
겨울이 오기 전에 나무를 많이 해놓아야 한다는 그녀.
나무 잘하는 머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웃는 그녀.
그것 말고는 아무때나 불쑥 찾아오는 방문객들
방문객에게는 처음이고 마지막인 모처럼 나들이.
무작정 반길 수도 박절하게 대할 수도 없는 입장.
“계십니까? 여기가 남난희씨 댁입니까?”
암튼, 흙냄새 묻어나고
솔바람이 불어오는 그곳.
잃어버린 마음 속 고향인듯.
..........
논골마을.
...........
몇년전 그녀의 후배가 들어와 살고 있다는 마을.
그녀도 후배를 만나러 가끔 찾아간다는 논골마을.
해발 5백m위에 위치한 전형적인 지리산 오지마을
하동군 청암면 금남리 북쪽 산길 따라.. '심곡리'.
심곡리 서쪽 우마차 길에서 5리 쯤 가면., 갈림길.
갈림길 오른쪽은 논골마을,
왼쪽은 사동마을로 가는 길.
논골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반 시간 이상 지속되는 오르막길.
남쪽에 웅장한 칠성봉이 우뚝 솟았다.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고갯마루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논골마을.
바깥 세계과 동떨어져 웅크리고 있는 마을.
마을 뒤편 산등성이에는 대여섯 그루 당나무
10여 가구 중 젊은 사람들은 찾아 볼 수 없다.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가 버리고
농사로 삶을 영위하는 전형적인 오지마을.
300년생 당나무로 보아 마을이 생긴지 오랜듯.
정감록에 따르면 지리산 남쪽 기슭에 피난처 3곳.
청암면 고은동, 오은동(논골), 묵계 심은동 = 3은동
3점리 (풍점리, 먹점리, 미점리) 역시 명당인 피난처.
논골마을은 6.25 당시 주민들이 한명도 다치지 않은 곳.
주민들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20여 만평 경작지
행정상 청암면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악양면에 가까운 면 경계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남부능선은
삼신봉 남쪽의 청학동과 북계리를 감싸며 갈라선다.
좌청룡 남쪽 시루봉을 거치며 논골의 뒷산인 깃대봉.
깃대봉 남쪽 10여Km 지점에는 칠성봉에 이르는 산줄기
논골서 악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자연 장벽.
장보러 다닐 때에는 산길 맥시골 또는 배티재
왕복 6시간 거리 악양장을 그 장벽 넘어 오간다.
깃대봉 남쪽의 안골에서 시작되는 반달 형태의 논골
남동쪽으로 휘돌아 사동과 심곡 쪽으로 빠지는 형태.
묵계 골짜기로부터 또 다시 9Km 정도 떨어진 산골이다.
청암 초등학교 심곡분교까지는 왕복 3시간이 걸리고
중학교가 있는 청암면까지 편도 2시간 반 걸리는 오지.
고갯마루 안골까지 4Km에 이르는 농경지 여러 곳에는
산제밭골, 잔치평전, 웃장구목, 아랫장구목 등의 지명
50여 가구의 옛 주민이 현재는 10여 가구로 줄게 된 곳.
당나무는 언덕빼기를 경계로
북쪽을 음달땅, 남쪽을 양달땅
동구쪽 공터는 진틀배기로 부른다.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오지의 삶을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
찾아가는 길.
하동에서 청학동행 버스를 타고 논골 입구에서 하차
하동에서 2번 도로를 이용해 횡천 청암을 지나 논골.
횡천에서 청암을 거쳐 청학동 쪽으로 가다가
하동호(청암호) 언저리에서 서쪽 샛길로 빠지면
예전 우마차 길이 좁은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포장
칠성봉 계곡 물이 흘러가는 칠성봉 산장 앞 계곡
그곳 지나 가파른 시멘트길이 끝나는 곳이 논골.
'흰구름 푸른구름'
마음이 갑갑할 땐 언덕에 올라
푸른 하늘 바라보자 구름을 보자.
저 산 너머 하늘 아랜 그 누가 사나
나도 어서 저 산을 넘고 싶구나.
푸른 구름 흰 구름에 흰 돛을 달아
산 너머 저 하늘에 띄워 보내자.
내 마음 펄럭이는 흰 돛이 되어
달나라 별나라를 맘대로 가자.
- 강소천 님의 동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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