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는 저잣거리에서 검을 사용하지않는다

산에관한이야기

남난희의 하얀능선에서면

남산동 2013. 3. 25. 08:47

         남난희의 <하얀 능선에 서면>

 

내 삶을 바꿔놓은 태백산맥 2천리


부산 금정산 고당봉을 출발해 진부령까지 이어지는 태백산맥을 홀로 걸은 이가 있다. 백두대간 종주 붐이 일기 시작한 1990년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다. 산이 좋아 산이 되고 팠다는 그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칫솔도 반으로 잘라서 휴대하고, 무거운 짐의 무게를 이겨내기 위한 하중 트레이닝도 꾸준히 실시했다. 5만분의 1 지형도 27장을 통해 지형을 꼼꼼히 숙지한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유난히도 큰 눈이 잦았던 지난 1984년, 새해 첫날 하얀 능선을 헤쳐 나가기 시작한 그는 두 달 보름여간의 동계종주등반을 무사히 마치고 진부령을 내려왔다. 산행 당시의 경험과 생각의 편린들을 담은 책 <하얀 능선에 서면>. 일기형식으로 엮은 이 책이 출간된 건 지난 1990년, 그 해는 백두대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해로 대간종주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모티브를 선사했다.


그가 종주한 코스는 지금의 백두대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산행 시발점을 부산의 금정산으로 잡았으니 지금의 태백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백두대간과 합류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시대적 인식의 한계일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기껏해야 지리산 종주가 성행하던 시절, 걸어서 국토를 그것도 능선으로 종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자체를 평가해야 마땅하다.

 

또한 책이 출간된 같은 해 일기 시작한 백두대간 복원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당시 TV와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들은 그의 태백산맥 종주를 비중 있게 다뤘다. ‘금녀의 성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성(性)의 경계가 무너진 요즘과는 달리 80년대 중반만 해도 개념에서 출발해 실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남자와 여자’라는 구별이 뚜렷한 시절. 여자 혼자서 겨울에 산길을 걸어 국토를 종주한다는 건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이슈였다.

 

혹자는 ‘국토의 얼을 찾기 위한 등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수식어를 갖다 붙이기도 했다. 언론의 속성을 이해하기엔 어렸던 그는 가급적 자신의 등반에 관한 말을 아꼈다. 산행을 마친 후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책을 펴낼 결심을 하게 된 이유다.  “고향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 한 친구의 갑작스런 자살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제겐 무척 큰 충격이었죠.

 

너무나 평범하고 구김 없어 보이던 친구였거든요. 한동안 나의 존재와 죽음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 산행을 마치고 홀로 산을 내려오는데 ‘죽음은 죽음 그 자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견디기 힘겨워 멋대로 내려버린 결론이었지만 막힌 물꼬가 트이듯 비로소 한참을 울 수 있었죠.”


한창 감수성 예민한 20대 초반의 나이,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끝없는 물음, 그리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은 그를 철저히 혼자일 수 있는 공간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것이 태백산맥 동계 단독종주였다.

 

산행 후 6년이 지나서야 책이 나오게 된 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산행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고 괴로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길도 나 있지 않은 겨울산, 가슴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치며 하루 종일 진행한 거리는 채 3km가 되지 않았다. 그럴 때면 눈 속에 파묻힌 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잡목덩굴 속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다 문득 바라본 자신의 모습은 거지와 별반 다름없었다. 열이 펄펄 나고 헛소리까지 하는 채로 텐트 안에 누워 있어도 적막한 산중에서 자신을 돌봐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힘겹게 한건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그 끝은 사람에게로 향해 있었다. 산 사랑이 지극한 그였지만 일주일에 한 번 만나기로 되어 있는 지원조를 기다리는 마음은 책 곳곳에 숨김없이 나타나 있다.  그 고통들은 어디에도 비교될 수 없는 고통이다. 그냥 나름대로, 그리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통은 끝이 없다. 정신과 육신도 비교될 수 없다. 그리고 혼자라는 것, 이제 혼자는 싫다. 더불어 살고 싶다. 여러 명이 함께 또는 단 둘이서라도 살고 싶다.    - 책 속에서

 

“힘겹고 외로운 순간들이 왜 없었겠어요? 그 때 만약 지원조가 없었더라면 해내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처음 산과 대면했던 날부터 시작해 지금까지의 삶을 후회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산을 알게 된 데 대해 무척이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죠. 그 안에 있을 땐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것 같은 포근함 같은 게 느껴지니까. 한 때 산을 오르지 않는 나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산에 오르지 않아도 행복한 나를 발견했죠. 아마 도시 생활을 계속 했더라면 여기저기 등 떠밀려 ‘나만의 산’을 갖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은 무척 행복해요. 산이 저를 받아주었고, 저 또한 산을 제 몸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거든요.” 그는 “태백산맥 종주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산에 대한 생각들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산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가 살아온 족적을 살펴보면 한 순간도 산에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스스로를 ‘직접 체험해보기 전까지는 좀처럼 믿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설명하는 그는 더욱 깊고 높은 산을 만나기 위해, 어쩌면 그보다도 더 넓고 미지의 대상들로 가득한 세상과의 만남을 위해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만약 종주산행에 대한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책을 읽는다면 적이 실망하게 될지 모른다.

 

그 책 속에는 산행에 필요한 실질적인 정보보다는 한 인간이 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홀로 걸으며 느낀 개인적 감상과 생각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눈 덮인 산길을 걸어가는 25세 산처녀와 만나고 싶다면 주저 없이 펼쳐보길 권한다. 그와 함께 울고 웃으며 하얀 능선을 밤새워 걷다 보면 젊은 시절, 스스로의 존재 이유와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고민들로 열뜬 밤을 지새우던 자신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요즘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쌍계계곡 상류, 경사면을 개간해 밭을 일구고 차를 재배하는 전형적인 시골마을 한편에 그의 보금자리가 자리해 있다. 구석구석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시골집에서는 예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마당 한편을 가득 메운 장독 속에는 그가 직접 담근 된장들이 익어가고 있다. 집 뒤 텃밭을 일궈 딴 녹차 잎으로 차를 내는 그는 평범한 시골 아낙의 모습이었다.

 

이전까지 그와 산과의 인연을 ‘등산’ 즉 오르는 산이라 정의한다면 산자락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을 ‘입산’이라고 정의하면 맞는 표현일지?  “산에 살려면 산을 내 몸처럼 여길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해요. 물론 조금은 모자라고 불편하죠. 때로는 외로울 때도 있고요. 하지만 지금의 제 삶에 무척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는 젊은 날 자신의 온 힘과 열정을 다해 올랐던 높은 산 대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작은 산사에 올라 108배로 매일 아침을 열고 있다. 

 

해맑은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편안해진다.


1957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한 그는 경남여상을 졸업하고 1980년에 상경,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우연히 북한산을 찾았다가 암벽등반에 매료된 그는 이듬해인 1981년 한국등산학교를 수료하고 82년에는 창립회원으로 록파티산악회에 가입하며 활발한 암·빙벽등반을 했다. 84년 태백산맥 여성단독 종주를 비롯해 86년에는 여성 최초로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했으며 ‘금녀의 벽’으로 알려져 있던 설악산 토왕성빙벽을 올랐다. 지난 1991년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정찰대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동시대를 대표했던 우리나라 여성 산악인 중 한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