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는 저잣거리에서 검을 사용하지않는다

산에관한이야기

남난희

남산동 2013. 5. 28. 18:37

남난희.

그녀에게서는 히말라야 옛 조상의 혼이 느껴진다
.
히말라야 설원과 티벹고원을 누비던 옛 조상의 혼
.
지리산 천왕성모의 영혼이 담겨있는 듯한 그녀의 삶
.

요즘 무박 주말산행 붐으로 대중화된..백두대간 종주

백두대간을 구간 구간 나누어 산행하는 붐이 일고있다
.
우리나라 국토의 등뼈에 해당하는 산맥이 백두대간이다
.

'
백두대간 첫 종주자는 놀랍게도 여성
.'

현재, 지리산 전설 속 마야부인 같은 삶
.
2
년 반 결혼생활 후 스님이 되어 떠난 남편
.
그녀는 아들 기범과 함께 화개골에 살고 있다
.

...........................................
...........................................
'남난희! 그녀는 누구인가
?'
...........................................
...........................................

1957 년 경북 울진 출생, 1981년 한국 등산학교를 수료
.
1984 년 1 1일부터 76일 간 국내 최초로 백두대간 종주
.
1984
3 16, 끝내 동계 여성 단독 백두대간 종주를 성공.

.................그녀의 술회
...................
"
그때는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이 있기 전이었다

유사 이래로 눈이 가장 많이 왔다는 그해 겨울

혼자서 76일 동안을 산에서 먹고, 자고, 걸었다
.

20
대 후반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을까
?'

정신과 육신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를 경험하는 일

그 산행으로 최고의 극한 한계를 모두 경험한 그녀
.
아직도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때 생각이 난다는 그녀
.

"
백두대간 산행 중 몹시 추웠던 어느날 산능선에서

텐트치고 밤을 보내려는데 유난히 찬 기운이 강했다
.
발끝에서 머리카락 끝까지 외로움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

산을 내려가기에는 너무 어두웠고 더구나 길도 없었다
.
외로움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텐트 밖으로 나온 그녀
.

눈사람이라도 텐트 옆에 두고 자려고 눈을 뭉쳐보았지만

너무나 추운 날씨에 내린 눈이라 잘 뭉쳐지지도 않았다
.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었다
. "
...............................................

당시 27세 처녀로 백두대간 단독도전은 불가사의
.
허리까지 빠지는 폭설, 굶주린 멧돼지 떼의 공격
,
밤새도록 텐트 속에서 울며 코펠을 두드렸던 그녀
.

'
그날밤이 그녀에게 얼마나 길고 무서웠을까
?'

감기 몸살 중에도 연료를 아끼려 혹한과의 싸움
.
전인미답 코스라 진로 막는 잡목 숲에 악전고전
.
식수가 귀한 눈밭에 허리까지 빠지며 겪는 갈증
.

그 눈밭을 러쎌로 헤치며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
.
인간 인내심의 한계점에서 엄습해 온 졸음과의 사투
,
중도에 하산하고 싶은 마음 억누르며 '자신과의 싸움
'.

칫솔 반 토막 내서 쓸 만큼 큰 배낭 무계와의 싸움
.
멧돼지 덫에 걸려 나무 위에 꺼꾸로 매달렸던 일화
.
그 덫이 발목이 아닌 등산화에 걸렸기에 무사 탈출
.

식수조차 귀한 산속에서 세수할 물이 있을 리 만무
.
생리기에도 쉴 곳이 없고 몸 씻을 물조차 없는 산 속
.
너무도 목욕하고 싶은 마음에 화전민가에 들렀던 그녀
.

"
총각은 군대 갔다 왔는가
?"
"....................."

목욕한 후 다시 홀로 산으로 올라가는 발걸음
.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도 울며 다시 오른 산속
.

오지마을 화전민에게 오해받을 만큼 장정 체격
.
큰 배낭을 짊어진 탓에 누구도 여자로 볼리 만무
.
여자이지만 여자 대접 받지 못할 때가 서러웠던 듯
.

'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여성다운 여성, 남난희
'.

그런 그녀의 마음을 첫 만남에서 사로 잡았던 남자
.
지리산에서 상경한 청학동 댕기머리 총각와 데이트
.
두 사람은 첫만남에서 밤새도록 술한잔으로 데이트
.

새벽녘 처녀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집에 바래다 준 청학동 총각
.
그 당시 밤새 술을 마셔도 대작할 남자가 없을 만큼 철녀인 그녀
.
그녀를 연약한 여자로 여기던 그 청학동 총각의 청혼에 결혼 결심
.

그녀를 순수하게 여자로 대한 남자는 그가 처음
.
그것이 그녀가 청학동에 둥지 튼, 운명적인 인연
.

그곳에 찾아가 내가 만난 그녀의 첫인상은 여성다웠다
.
둥굴레차를 권하며 섬진강이 오염될까 봐 걱정하는 모습
.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몸에 배인 그녀는 정말 산악인 답다
.

1986
년 여성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7455m) 등정
.
1989
'금녀의 벽'이라는 설악산 토왕성 빙벽 폭포를 두 차례 등반
.
<
하얀 능선에 서면> <낮은 산이 낫다> (학고재·2004) 3 권을 펴냄
.
1991
년 강원도 정선으로 들어가 삼 년 간 '정선 자연학교'에서 교장
.

'
정선 자연학교'는 임대한 폐교에서

도시 학생들에게 여름철 자연 교육장
.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산에 오르고, 들풀을 뽑고, 돌탑 쌓고, 물놀이했다
.
자라나는 2 세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천연 식단으로 건강 교육
.
하지만, 태풍 루사로 인해, 그녀가 2년 반 쏟았던 정성은 물거품처럼.. 폐허
.

그 후 그녀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전통 찻집 '백두대간'을 운영
.
그 실내장식을 어떻게 할지 고민 중에 대동여지도 생각이 났고
,
이우형 선생 도움을 받아 대동여지도 한 점을 찻집 천장에 붙였다
.

그녀는 아들 기범이와 함께 지리산 화개 장터 위쪽 화개골에 산다
.
그녀는 스님이 된 후 그녀 곁을 떠난 남편의 도움으로 그곳에 정착
.
그 흙집에서 증제차, 녹차, 가죽나물, 남난희 표 된장을 제조하며 생활
.
그곳에 이사온 후 남성용 사각팬티와 러닝을 즐겨 입게 되었다는 남난희
.

남성같은 강인함보다 옷을 입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편안함 때문이란다
.
그녀는 천왕성모처럼 만난 남편과 헤어져, 마야부인처럼 살아가는 산 전설
.

"
아궁이에 불을 때면 얼마나 행복한지....세상에 그 어떤 향수가 나무 타는 냄새에 견줄 수 있을까 싶다. 여름에는 대문을 걸어 잠그기만 하면,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 된다. 맨발로 마당을 서성이거나 아예 마당에 퍼 질러 앉아서 땅기운을 그대로 받으며 풀을 뽑기도 하고, 더우면 시원한 우물물로 몸을 식힌다. 그리고는 그냥 발가벗은 채로 마당을 서성이며 몸을 말리기도 한다. 대문을 활짝 열어 두어도 들어올 사람은 없다." ---남난희 저 '하산' 중에서...248쪽 글 인용
.---

대나무 숲을 지나 지리산 자락에 안긴 그녀의 집
.
그녀가 외출했을 때면 대문에 못 하나 걸린 문고리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잠금 장치가 그녀의 심성을 대변
.

봄이면 집 주변에서 나물을 캐고, 대밭에서 죽순을 딴다
.
텃밭에서는 농약이나 비료를 쓰지 않고 기른 고추와 감자
,
, 배추, 상추, 호박, 오이, 토마토를 여름 가을에 수확
.

자연에서 수확한 그대로 먹거나 데쳐서 먹고
,
양념도 담근 간장이나 된장을 조금 넣는 정도
.
가죽나물, 음나물, 취나물, 잰피, 산초 장아찌
.

손님이 오면 잡곡밥을 안치고 두부를 숭숭 썰어 넣고

청국장을 끓여 내고 장독에서 묵은 김치를 내오는 그녀
.
틈틈이 캔 쑥부쟁이와 머위나물 그리고 석빙고의 장아찌
.

평소 그녀의 밥상은 소박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
밥에 된장과 김치 또는 된장찌개와 나물 비빔밥
.
햇빛에 탄 피부와 순박한 웃음에서 피어난 건강함
.

그녀는 농사를 지을 때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
자연에서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
.
그것이 자연에 기대어 살고싶은 그녀 마음의 자세이다
.

약간 모자란 듯, 사는 것이 자연에 가까이 가는 방법

풀잎, 돌멩이 하나도 자연을 아프지 않게 하려는 마음
.
이웃과 나눌 정도의 수확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그녀


된장을 팔아 최소한의 생활비 정도에 만족하려는 그녀
.
자신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만큼만 만들어 판매를 한다
.
친구들의 도움을 받지만 돈을 주고 사람을 쓰지는 않는다
.


“된장은 햇볕과 공기, 물 자연의 힘을 빌려 담그는 거예요
.
거기에 세월의 맛, 옹기의 맛이 더해지고, 내가 기운을 보태요
.
발효 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기가 좋아야 만든 음식 맛도 좋아져요
.

때문에 옹기에 담을 때는 맨손으로 퍼 담아요
.
제 건강한 기운이 장에 배어 전해지길 바래요.



차 역시 집 뒤 언덕에 있는 야생 차밭에서 수확한다
.
그녀를 찾아오는 손님과 함께 나눌 정도면 족하단다
.
그녀는 도시에서 살 때나 지금이나 차를 즐겨 마신다
.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에요
.
자연이 제공해 주는 먹거리가 있는 시골이라 가능한 일
.
제가 아는 사람들과 나눠 먹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한 일
.
정성 다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건강해지면 저도 좋죠.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것 같다
.
더 이상 가지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는 그녀
.
진정 욕심없는 그녀는 산에 사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

2005
년 현재 49 세인 그녀에게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소망
.
38
선에서 멈췄지만 백두산까지 완주하고 싶은 백두대간 종주
.
국내 최초로 완주할 기회가 그녀에게 주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산에서 살어리랏다
.

"내가 한국 여성의 대표 산악인이 되는 계기는

1984
1 1일 시작한 단독 태백산맥 종주등반

그때는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이었다
.

부산이라는 땅덩어리가 생기고 난 후

눈이 가장 많이 왔다는 그 겨울이었다
.
혼자서 76일을 산에서 먹고 자고 걸었다
.

20
대 나이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

대신 너무 힘들었고 외로웠던 기억이 난다
.
하지만 그런 푸념은 뒷발자국으로 남긴 채

1984
3 16일에 끝끝내 산행을 마쳤다
.

사람들은 성공이란 단어를 썼고 나는 허탈했다
.
하지만,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던 것 같다
.

정신과 육신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를 경험하는 일

그 최고의 극과 극을 모두 경험한 것은 행운이었다
.

그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견딜 수 있는 끈기가 생겼고
,
당당하게 맞설만한 힘이 생겼다
.

'
어느새, 산행은 내 삶의 기준
.'

그후, 매일 밥 먹듯 숨을 쉬듯

암벽을 올랐고, 빙벽을 올랐다
.
그리고, 히말라야까지도 올랐다
.

어쩌다보니 남보다 앞서 올랐지만

그것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내가 어떤 산을 가든지
,
어떻게 산행을 하든지

그것은 나의 의지지만


산이 나를 받아 주지 않으면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래서 나는 항상 산 앞에 최선
.

산 앞에서 겸손하고자 했고
,
고마워했고, 당당하자고 했다
.

나 자신에게 당당해야

산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으니까
!

산에게 선택된 자로서

부끄러운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
그리고 산이 향상 그리웠다
.

지금 내개는 "도전"이란 단어가 너무 생소하다
.
적어도 산 앞에서는 도전이라는 단어는 안 된다
.
인간이 자연에게 도전이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

굳이 도전이라 해야 한다면

자신과의 도전이 아닐까 싶다
.
자신의 의지, 용기, 기술, 힘 등
.

요즘 자연을 벗삼아 산속에서 살아보니

더욱 그런 사실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

지금은 예전처럼 강도높게 산행하지 않지만

여전히 산을 편한 마음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

예전에는 최초 최고 타이틀이 붙은 등산을 했다면

이제는 그저 입산이고 편안하게 산과 만나는 것이다
.

과거 목적 때문에 산의 한부분에만 집착했다면

지금은 산 안에 모든 것과 교류하고 산과 합일
.
산이 곧 나 자신이고, 내가 곧 산의 일부분인듯
.

오늘처럼 눈이 쌓인 날이면 지난날 열정이 생각난다
.
어느 겨울날 산능선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려는데

그날은 유난히 찬 기운이 강했고 외로움이 엄습했다
.

손끝, 발끝에서부터 머리카락 한올 한올까지


숨막힐 것 같았지만 하산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
더구나 길도 없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텐트 밖으로 나와 눈사람이라도 옆에 두고 자려고

눈을 뭉쳐보았지만 너무 추워 눈도 뭉쳐지지 않았다
.
그때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 뿐이었다
.

그당시 힘겨웠던 산행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고행이 아니라 수행이었다는 것을 알 것 같다
.
그래서 오늘도 산에게, 자연에게 감사하며 산다
."


자연에서, - 남난희
.


자연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욕심은 절대 금물이다
.

언제부턴가 나의 삶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

또 어느 곳에도 가고 싶지 않고
,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
.
물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이다
.

참 좋다
.

....................
....................

76
일간 백두대간을 단독 종주한 여성 산악인

여성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 등정

그러한 그녀가 산을 타는 방법은 옛날과 다르다
.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조바심치지 않고

바삐 걷지 않고 중간에 하산을 해도 상관없다
.
예전에 등산을 했다면 지금은 入山한다는 그녀
.

그녀가 최근 펴낸 에세이 ‘낮은 산이 낫다’


그러한 삶의 변화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
여성 산악인끼리의 에베레스트 등반 계획 좌절

잠적, 결혼, 출산, 서울을 벗어나 지리산으로 이사
,

이혼, 강원 정선자연학교 교장
,
태풍 루사로 자연학교 풍비박산
,
다시 지리산 화개골에 정착한 그녀
.

삽시간에 생명을 앗아가는 강가푸르나의 돌풍보다

자연학교를 날린 태풍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깨달음
.

이십대에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갈증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성취욕에 쫓긴 삶

그게 자신과 남에게도 상처를 주었다는 그녀
.

이제 그녀는 산을 오르는 대신에 산자락에 살며

찻잎을 덖고, 콩으로 메주를 빚고 된장을 만든다
.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지리산 대자연과 아이
.

풀 두번 매준 정도여도, 콩은 잘 자라준다
.
'
애인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녀의 아들

비오면 까치 잠자리가 무사할까 걱정하는 아이


한 해를 시작하는 날과 두 사람의 생일날

해마다 그녀는 아이와 맞절 의식을 치룬다
.
아이가 있기에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그녀
.

지나간 삶이 산으로 오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아무 것도 원하는 바 없는 지금이 평안한 삶
.
그게 지금의 삶이고 그 평안이 참 좋다는 그녀
.

집 앞뜰에 가지런히 정렬한 수십 개의 장독독
.
평상에 앉아 있으면 뜰악을 날아다니는 반딧불

구름 속에 가려있다가도 불쑥 나타나는 훤한 달빛
.

서울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달빛보다 두 배는 밝은듯
.
겨울이 오기 전에 나무를 많이 해놓아야 한다는 그녀
.
나무 잘하는 머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웃는 그녀
.

그것 말고는 아무때나 불쑥 찾아오는 방문객들

방문객에게는 처음이고 마지막인 모처럼 나들이
.
무작정 반길 수도 박절하게 대할 수도 없는 입장
.

“계십니까? 여기가 남난희씨 댁입니까?


암튼, 흙냄새 묻어나고

솔바람이 불어오는 그곳
.
잃어버린 마음 속 고향인듯
.


..........
논골마을
.
...........

몇년전 그녀의 후배가 들어와 살고 있다는 마을
.
그녀도 후배를 만나러 가끔 찾아간다는 논골마을
.
해발 5m위에 위치한 전형적인 지리산 오지마을


하동군 청암면 금남리 북쪽 산길 따라.. '심곡리
'.
심곡리 서쪽 우마차 길에서 5리 쯤 가면., 갈림길
.

갈림길 오른쪽은 논골마을
,
왼쪽은 사동마을로 가는 길
.

논골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
반 시간 이상 지속되는 오르막길
.
남쪽에 웅장한 칠성봉이 우뚝 솟았다
.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고갯마루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논골마을
.

바깥 세계과 동떨어져 웅크리고 있는 마을
.
마을 뒤편 산등성이에는 대여섯 그루 당나무

10
여 가구 중 젊은 사람들은 찾아 볼 수 없다
.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가 버리고

농사로 삶을 영위하는 전형적인 오지마을
.
300
년생 당나무로 보아 마을이 생긴지 오랜듯
.

정감록에 따르면 지리산 남쪽 기슭에 피난처 3
.
청암면 고은동, 오은동(논골), 묵계 심은동 = 3은동

3
점리 (풍점리, 먹점리, 미점리) 역시 명당인 피난처
.

논골마을은 6.25 당시 주민들이 한명도 다치지 않은 곳
.
주민들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20여 만평 경작지

행정상 청암면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악양면에 가까운 면 경계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남부능선은

삼신봉 남쪽의 청학동과 북계리를 감싸며 갈라선다
.
좌청룡 남쪽 시루봉을 거치며 논골의 뒷산인 깃대봉
.

깃대봉 남쪽 10Km 지점에는 칠성봉에 이르는 산줄기

논골서 악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자연 장벽
.

장보러 다닐 때에는 산길 맥시골 또는 배티재

왕복 6시간 거리 악양장을 그 장벽 넘어 오간다
.

깃대봉 남쪽의 안골에서 시작되는 반달 형태의 논골

남동쪽으로 휘돌아 사동과 심곡 쪽으로 빠지는 형태
.
묵계 골짜기로부터 또 다시 9Km 정도 떨어진 산골이다
.

청암 초등학교 심곡분교까지는 왕복 3시간이 걸리고

중학교가 있는 청암면까지 편도 2시간 반 걸리는 오지
.

고갯마루 안골까지 4Km에 이르는 농경지 여러 곳에는

산제밭골, 잔치평전, 웃장구목, 아랫장구목 등의 지명

50
여 가구의 옛 주민이 현재는 10여 가구로 줄게 된 곳
.

당나무는 언덕빼기를 경계로

북쪽을 음달땅, 남쪽을 양달땅

동구쪽 공터는 진틀배기로 부른다
.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오지의 삶을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



찾아가는 길
.

하동에서 청학동행 버스를 타고 논골 입구에서 하차

하동에서 2번 도로를 이용해 횡천 청암을 지나 논골
.

횡천에서 청암을 거쳐 청학동 쪽으로 가다가

하동호(청암호) 언저리에서 서쪽 샛길로 빠지면

예전 우마차 길이 좁은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포장


칠성봉 계곡 물이 흘러가는 칠성봉 산장 앞 계곡

그곳 지나 가파른 시멘트길이 끝나는 곳이 논골
.


'
흰구름 푸른구름
'

마음이 갑갑할 땐 언덕에 올라

푸른 하늘 바라보자 구름을 보자
.

저 산 너머 하늘 아랜 그 누가 사나

나도 어서 저 산을 넘고 싶구나
.

푸른 구름 흰 구름에 흰 돛을 달아

산 너머 저 하늘에 띄워 보내자
.

내 마음 펄럭이는 흰 돛이 되어

달나라 별나라를 맘대로 가자
.

-
강소천 님의 동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