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는 저잣거리에서 검을 사용하지않는다

산에관한이야기

14좌완등 구시대의 마지막 트로피

남산동 2010. 5. 6. 19:55

“14좌 완등, 구시대 마지막 트로피

원로산악인 이용대씨 "14좌 정복을 보노라니…"

원로 산악인은 끝내 TV를 꺼버렸다고 했다. 지난달 27일 오은선(44) 대장의 안나푸르나 등정 모습을 전하는 KBS 생방송 '여기는 안나푸르나'를 보던 중이었다. 그리고 후배 산악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생, 방송 봤어? 아니, 지금 생중계하는 거. 저게 도전 맞아? 무슨 신화 만들기 같아서… 시대가 바뀌었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세계 등산의 역사를 다룬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저자 이용대(73)씨는 할 말이 많았다. 한 등산학교의 교장을 맡아 일반인에게 등산을 가르치고 있는 그를 6일 서울 남영동 산악잡지 '월간마운틴' 사무실에서 만났다.

'황금 피켈상' 한국인은 왜 없을까

그는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냈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20개팀이 이를 해냈다. 여성은 오 대장이 처음이다. 역사적인 기록이지만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등산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도 14좌 완등은 2005년에 한 명(앨런 힝크스)밖에 안 했어요. 산악 강국인 프랑스는 14좌 완등자가 한 명도 없죠. 왜일까요?"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까요?
"천만에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예요. 중요했다면 해마다 서너명씩 나왔을 겁니다. 자, 두 번째 질문을 해볼게요. 14좌 완등 20개팀 중 한국팀이 4팀이나 돼요. 그런데 프랑스 산악잡지 '몽타뉴'가 주는 '황금피켈상'을 왜 한국은 한 명도 못 받았을까요?"

황금피켈상은 산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해마다 세계 등반대 중 '더 빨리' '더 새롭게' '더 어렵게' 올라간 최고의 팀을 뽑아 수여한다. 한국은 국내 산악잡지가 2006년 몽타뉴와 협약을 맺고 만든 '황금피켈상 아시아' 부문 수상자만 있을 뿐 본상을 받은 적은 없다.

"이제 인간이 밟아보지 못한 미답봉은 세계에 없어요. 산 정상을 정복하는 '등정(登頂)주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겁니다. 세계 산악계는 새로운 루트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더욱 극한 도전에 내모는 추세로 가고 있어요. 그것이 '등로(登路)주의'입니다."

-남이 오르지 않았던 길을 간다는 것인가요?
"그렇죠. 등산이란 애초에 도전의 역사예요. 자신의 내면에 대한 도전, 자기만족과 자기성취. 불확실성 가득한 거대한 존재에 인간이 맨몸으로 부딪쳐 올랐던 거죠. 그 도전에 사람들이 성원을 보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너도나도 상업등반만 해요."

-해외 원정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잖아요.
"지금은 말이죠, 몇 억원 내면 원정등반 준비를 해외 대행사들이 다 해줘요. 각종 현지 정보 가져다주고, 셰르파(등반보조인)와 호텔 구해주고, 산소통 등 필요 물품을 해발 4500m 베이스캠프까지 수송도 해줍니다. 매년 이렇게 400여명이 에베레스트에 오릅니다. '정상 티켓'을 사는 셈이죠. 좀 더 편하게, 좀 더 빨리 올라가려고 쓰는 돈이 많아요. 그나마 이 정도는 괜찮아요. 보편화됐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죠. 방송 생중계 같은."

-방송 중계 덕에 국민들이 안방에서 안나푸르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는데 카메라맨이 함께 뛰어서 생중계했다고 쳐요. 결승선을 먼저 통과한 카메라맨이 선수가 들어오는 모습을 찍으면 올림픽 신기록은 카메라맨이 먼저 세운 거죠? 그 험난하다던 안나푸르나에 카메라맨과 연출자가 앞장서 가면서 '여기 이런 모습으로 서봐라' 하는 걸 국민 모두가 봤어요. 그게 좋게 보였을지 확신이 안 서요. 등반가의 영혼이 상업주의에 이용당했다는 느낌…."

-그만큼 의미 있는 기록이기 때문 아닐까요.
"14좌 완등이라는 기록이 있긴 하죠. 그런데 1980년대 남성 산악인에게 이미 정복돼 의미를 잃어서 그렇지. 은선이의 '여성 최초 14좌 완등' 기록은 수집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구시대의 기록인 셈이에요. 폄하할 생각은 없어요. 등산의 기본 정신이 점점 잊혀져 가는 게 안타깝다는 얘기죠. 다 내 후배들이니까."

등반가의 영혼

국제산악연맹(UIAA)은 1990년대 초반 등반의 한 장르로 '알파인 스타일'을 정의했다. '대원은 6명 이내' '고정로프 설치 금지' '사전정찰 금지' '포터나 셰르파 지원 금지' '산소기구 휴대금지' '로프는 1∼2동만 쓸 것.' 문명의 이기를 철저히 배제한 등반 방식이어서 '포기등반'이라고도 불린다.

이전까지는 정상을 향해 조금씩 캠프를 전진시켜 가던 '극지법 스타일'이 주류였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 등정할 봉우리가 거의 남지 않은데다 첨단 기술 발달로 이런 등반이 너무 쉬워지면서 알파인 스타일이 부상했다. 왜 산악인들은 자꾸 어려운 길로만 가려고 할까.

"불확실하고 어려운 길을 택해 정당한 방법으로 극복하는 게 등반의 기본정신이에요. 14좌 완등도 그래요. 산악인들은 이전 성공 방식을 피하는 게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여기거든요."

전설적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는 1986년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그러나 예지 쿠쿠츠카(폴란드)는 메스너가 시도하지 않았던 겨울 등반에 나서서 이듬해 14좌를 완등했다. 이후 2002∼2009년 14좌 완등을 한 스페인 등 6개팀은 무산소 등반을 택했다.

이씨는 "14좌를 완등한 한국인 4명(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오은선)은 '남이 갔던 길'을 따라 갔어요. 그래서 한국 산악계에 붙은 별명이 '피크 헌터(정상 수집가)'예요"라고 했다.

-등반에도 품격이 있는 건가요?
"등반이 육체적 스포츠 같지만 실제 추구하는 건 내면의 철학입니다. 얼마나 힘들었느냐는 자기와 산의 관계이지 남과 경쟁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내가 손가락 장애가 있다면 등반하는 데 어려운 거지, 경쟁자가 나보다 더 유리하다는 의미는 아닌 거죠."

-척도가 있을까요?
"지금은 인공위성으로 날씨까지 받아서 가니까 불확실성이 사라졌어요. 그러면 이제 보조기구를 안 쓰는 거죠. 인간 한계에 도전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등산이에요. 세계 산악계도 그런 흐름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민족주의가 너무 많이 개입해요. 봐라, 우리가 1등이다, 하는…."

-예전에 비하면 산악인구가 많이 늘었죠?
"이제 '어디에' 올랐는지뿐 아니라 '어떻게' 올랐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요. 돈 가지고 안 되는 게 없는 시대에 등반가의 영혼이 훨씬 값진 거죠, 최초라는 기록보다."

-오은선씨의 14좌 완등 기록을 놓고 논란이 있습니다.
"은선이도 우리가 보호하고 데려가야 할 후배예요. 큰일을 한 건 맞아요. 다만 지나치게 경쟁 위주로 등반하면서 이런저런 의혹이 남았는데…. 경쟁자였던 에두르네 파사반(37·여·스페인)이 14좌 완등을 끝내면 세계의 권위 있는 등반 저술자들이 어떻게 기록할지 봐야겠죠."

-인증 제도를 도입하는 건 어떨까요.
"안되죠. 등반은 철저히 산악인 양심에 기대는 겁니다. 히말라야 등반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가 은선이를 인정한 것도 그의 양심을 믿은 거죠."

이탈리아의 유명 산악인 한스 카머랜더는 지난 4일 독일 슈피겔지 인터뷰에서 "오은선은 사이클 대회에 오토바이를 타고 참가한 격"이라고 비판했다. 이씨는 "은선이도 피해자일 수 있다. 산의 숫자와 높이에만 집착하는 성과주의, 1년 안에 몇 개 봉을 올라 달라는 집요한 스폰서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도(Altitude)보다 산을 만나는 태도(Attitude)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