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하던 천황봉에 다시 논쟁이 붙었다. 신문기사(연합뉴스2007.11.13)를 보니 이번에는 논쟁을 넘어 ‘시군지명위원회’에서 의결까지 했단다. 지명의 제정이나 개정은 측량법 제58조에 근거하여 시군구지명위원회, 시도지명위원회, 중앙지명위원회에서 차례로 심의․결정된 사항을 건설교통부장관이 고시하도록 되어 있으니, 그 첫 번째 절차를 마친 셈이라 하겠다.
늘 그랬듯이,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논지는 "민족정기 말살을 위한 일제의 창지개명(創地改名)" 이다. 또한 그 근거로 옛문헌들을 들고 있다.
보은군 지명위원회에서 제시한 근거는, 대동여지도 팔도궁현도 등 고지도와 1930년 법주사 호영 스님이 그린 법주사도 등에 '천왕봉'으로 표기돼 있고 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 고서에도 속리산 정상에 '천왕사'라는 사찰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점을 들고, 부언하기를 '천황봉'은 일본의 왕을 빗댄 일제잔재로 결론 맺었다.
위와는 달리 ‘천황봉’으로 기재된 옛문헌 또한 없지 않지만, 문헌에 대해서 감히 논할만한 식견이 내게는 없다. 다만, 궁금한 바는 ‘일제가 그랬다’는 구절에서 속 시원한 근거를 보지 못한 점이다. 그 ‘일제’는 누구인가. 이 땅에서 백두대간을 지워버리고 태백산맥을 만든 사람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산 이름을 바꾼 ‘일제’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이토오히로부미 인가, 조선총독부 인가, 아니면 요즘으로 치면 문부성 인가... 백두대간을 없앤(산맥을 만든) 사람은 실명이 분명하게 알려진 반면, 창지개명(創地改名)한 사람은 그냥 ‘일제’로 통칭된다.
나는 친일파도 아니고, 일제의 앞잡이나, 대동아전쟁의 불가피성에 동조하는 사람 역시 아니다. 조상중에 친일파가 있어 이를 은폐하려 물을 타려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시간 나는대로 지도 한장 들고 산으로 가는 ‘산꾼’일 뿐이다.
산꾼으로서, 산에 갔다온 다음 산행기를 적어가다가 지명에 대해 혼란을 느낀적 여러번이다. 한 지점을 두고 각각 다른 이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한자말과 이에 대한 유래들, 지도에 인쇄된 이름과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의 불일치 등.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긋난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과 자주 마주친다.
천황봉에 대한 내 생각은,
현재 우리나라에 법령에 의해 고시된 천황봉 또는 천황산은 17개 이다. 대표적으로 속리산 천황봉과 계룡산 천황봉, 또 밀양의 천황산과 월출산 천황봉은 익히 들어본 이름이겠으나, 의령 진주 남원에도 천황산은 있다. 통영 앞바다 두미도에도 있고, 사천 서포면의 섬에는 해발 75.9m의 천황봉이 있다. 이중에서 일제가 발행한 지형도에 표기된 천황산은 9개이나, 서포면 섬의 천황봉(75.9m)도 일제의 지형도에 의젓이 자리잡고 있다. (박성태님의 “우리 산이름 이렇게 본다”(월간山 2005.12) 참조)
여기에서부터 나의 의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창지개명의 대작업을 벌인 그 ‘일제’는 외딴 무인도에 있는 천황봉은 미쳐 보지 못한 것일까. 우리 생각대로라면 당연히 없앴어야 할 사항인 것이다. 감히 천황폐하를 무인도로 귀양을 보내고서야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백두산 장군봉은 그 ‘일제’가 저들의 천황 다이쇼(大正)를 모셨음이 분명하다. 일제 강점기동안 장군봉은 대정봉이란 이름으로 지냈음이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는 당연히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으로 가야할 장면에서 어찌하여 온 천지에 중구난방으로 천황을 퍼뜨린 것인가. 지리산이 속리산보다 낮거나 산세가 약해서 인가?
지도는 추상화나 예술작품이 아닌 정보(情報, information)다. 엉터리 정보가 기재된 지도는 지도로써의 가치가 없다. “천황봉 정상을 탈환하라” 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선봉 소대장이 암만 찾아봐도 천왕봉은 있는데 천황봉은 보이지 않는다... 작전이 제대로 수행되겠는가.
일제가 만든 지형도(1914~1918)는 저들의 음흉한 목적에 의해 제작되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조선사람들을 포함한 다른나라 사람에게 보여주고, 의식을 바꾸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자기네들의 비밀스런 임무(침략, 수탈)를 위한 자료이므로 조금이라도 사실과 가까운 정보가 요구될 뿐, 굳이 혼선을 보탤 일은 전혀 없는 것이다.
‘개똥’이나 ‘말년’이를 동건이나 효리로 바꾸는 일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의 활동에 날개를 다는 일이 될 수도 있으나, 자연물에 대해 이름을 바꾼다고 공시지가가 오를리도 없고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일도 아닌 것이다. 민족정기 또는 나라의 정체성을 굳이 산이름에서 찾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함이다. 저들의 천황을 모시고 있다고 저들이 우리를 깔본다고 생각 하는가.
일본에는 한국산이 꿋꿋이 살아있다.
일본 규슈에 있는 소보산엘 갔다가, 함께한 일본 친구들로부터 아주 뜻밖의, 규슈에 한국산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이미 전부터 천황산의 논란을 익히 아는지라, 관심을 갖고 어째서 일본에 한국산이 있느냐를 물었다. 똑 부러지게 설명을 할만한 지식이 없는 친구였지만 대충의 내용은,
“올라가면 한국이 보인다고 한국산... 일본 1대 천황(神武)의 태생과 관련이 있다...” 였다. -검색하면 다 나온다- 덧붙여, 일본 1대천황이 백제사람이었다는 것도 아느냐고, 까딱하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짓궂은 질문을 했는데도 의외로 덤덤하게 그런말을 들은적이 있다는 대답을 했다. 규슈 기리시마국립공원의 최고봉 韓國岳(1,700m)으로 일본 지형도에 분명하게 표기가 되어 있다. (山(야마)과 岳(다께)를 구분짓는 분명한 구분은 없는 것 같다)
우리네 정서대로라면, 진작에 닦아 없앴어야할 이름 아닌가. 만약 우리나라에 日本山이 있었다면 어찌되었겠는가. 진작에 날려 보냈음이 명약하다. 비약이긴 하지만 또 다른 가정을 해보자. 기독교의 원조인 이스라엘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다면, 문수봉 원효봉 관음봉 의상봉...은, 요한봉 베드로봉 야곱봉 요셉봉...으로 바뀔것이라 생각하는가?
지도는 정보물일 뿐이다. 원래의 이름이 누군가의 어떤 목적에 의해 변질되었다면, 이를 바로잡는 일은 당연지사다. 천황봉을 ‘일제의 만행’으로 몰기에는 너무 미약하지 않는가. 더불어 인왕산 발왕산 가리왕산 등에서의 왕(旺)도 ‘일제의 소행’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는 생각 역시 마찬가지 이다. 바로 잡아야할 ‘일제 만행의 흔적’은 아직도 우리생활 곳곳에 남아있다. 일제가 남긴일이라 해서 무조건 만행으로 몰아 없애는 우(愚)는 범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의령의 자굴산을 두고 ‘자굴산이 아니라 도굴산이 맞다’라는 주장을 하기전에 의령사람들의 생각을 물어보기나 했는가. 설사 그들이 제시한 자료가 모두 맞다고 치더라도 수백년 전에 한자로 표기된 책자 보다는 현재 그 땅을 딛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주기 위함이라면 정작 시급히 찾아야 할곳은 따로 있다. 백두대간 자병산은 이미 그 형체가 없어진지 오래이고, 추풍령의 금산은 반쪽만 겨우 남아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그 속살을 파먹는 작업이 진행중인 곳이 한두군데 인가. 낙남정맥 장전고개에 골프장을 열려는 사람이 제시한 환경영향평가서의 마루금은 엉뚱한 곳으로 그어진 채 그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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